[청산의] 사진 (w.우초원)







아마도 도서실의 난방기가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그날도 평소랑 별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은 책을 읽고 도서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겠지. 하지만 예정보다 조금 일찍 방으로 돌아가게되었다. 잠시간은 있을만 했지만 오랜 시간을 있기에는 조금 추웠다. 제 물건을 챙기며 양팔로 안듯이 들고는 복도를 걸었다. 복도 중간에 열린 창문이 있었는지 찬 바람이 휭 하고 불었다. 차가운 바람에 놀라 몸을 움츠리며 걷다 보니 앞을 보지 못 했다. 누군가 있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 했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상대방과 부딪히고말았다.



" 뭐야. "

" 아... "



후두둑.

제 팔에 들려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읽던 책과 공책, 필통, 휴대폰 그리고 일기장.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은 평소에는 꼭꼭 잠가둔다. 지금은 쓰다가 열어둔 채로 방으로 돌아가던 터라 잠기지 않은 일기장은 떨어지면서 속을 훤히 비추며 그 안에 감추고 있던 것들을 바닥에 흩뿌렸다. 여러가지 명언이 적힌 포스트잇이 색색별로 두어장 떨어져 꽃잎처럼 팔랑이며 바닥으로 내려앉았고 개중에는 메모해서 꽂아둔 여러가지 낱장의 무언가도 있었고, 오래된 듯한 낡은 사진 한 장도 있었다. 




 

    


  ◈  






어릴 적에는 지금이랑은 많은 것이 달랐다. 엄마도 있었고, 오빠도 다정했고, 아빠도 술만 먹지 않았었다. 그 때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냥 모든게 다. 언제나 엄마가 예쁜 옷을 입혀줬고, 머리를 묶어줬고, 맛있는 걸 해주셨다. 아침에는 늘 유치원에 데려다 주셨고 저녁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데리러 와 주셨다. 언제나 엄마 뿐이었다. 그런 엄마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갔을 적에는 이런저런 추억거리도 있었다. 지금이랑은 전혀 다른 행복한 추억들. 


그중에는 옆집에 살던 오빠가 한명 있었는데 같은 유치원에 다녔었다. 우리 오빠랑 같은 나이였다. 다만 그 오빠는 우리 오빠랑은 친하지 않았던것 같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 오빠는 누구랑도 그다지 친하게 지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혼자만 어른들이 입는 어른 옷 입고 다녔다. 머리도 눈도 새까맣던 그 오빠는 늘 개미집을 나뭇가지 같은 걸로 파고 있었다. 개미집에 물을 붓기도 했었다. 그거 보고 나는 개미집에 홍수 난다고 울었던거 같다. 


가끔은 엄마들이랑 같이 놀이터에서 같이 놀아준 적도 있는데, 내가 모래로 두꺼비집 만들고 있으면 옆에 와서 구경하다가 다 만들면 항상 발로 부셨었다. 한번은 내가 아직 두꺼비 집에서 손을 꺼내기 전이었는데 발로 부수다가 내 손을 밟아서 내가 울었던 적도 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새로 만들어 준적도 있다. 그 오빠는 흙같은거 절대 안만졌었는데. 나 때문에 새 두꺼비집도 만들어 줬었다. 물론 그 뒤에 다시 자기가 부수고 가버렸던거 같기는 한데. 사실 만들어 준거 다음에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어쩌면 만들어 주었다고 기억하는 것도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 워낙 오래된 기억이니까.   



" 야. 야. 꼬맹이. "

" 왜에? "

" 내가 재밌는거 보여줄까? "

" 먼대? "

" 봐봐라. "



언젠가 먼저 불렀던 적이 있는데, 그 사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쩌면 제 기겁증은 그날 생긴 트라우마일지도 모른다. 매미같기도 하고 무언가 곤충이었던 것은 기억나는데 사실 무엇이었는지까지는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나지만 희미하게 매미였을거라고 생각이 든다. 오빠는 자신이 잡은 매미를 자랑하려는 사람처럼 자랑스럽게 내게 제 손에 있는 곤충을 보여줬고 나는 늘 높은 나무에만 있어 가까이 볼 수없었던 매미를 신기해 하며 그걸 들여다 보고있었는데, 그는 갑자기 날개와 다리를 전부 잡아 뜯어냈다. 산채로 팔다리가 뜯기는 기분은 어떤걸까. 나는 그걸 보고 기겁했지만 그것 보다 더한 게 기다리고 있었다. 



" 매미폭탄! "

" 으아앙~! 엄마아아아!! "



그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라이터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사지가 뜯겨 바닥에서 온몸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매미에게 불을 질렀다. 그걸 제쪽으로 던지기 까지 했다. 자세한 과정은 기억이 안나지만(기억하고싶지도않지만) 사지가 뜯기고 몸에 불이 붙은 매미는 땅바닥에서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아가며 미친듯이 괴상한 소리를 내었고 굉장히 좋지않은 냄새를 풍기면서 눈앞에서 아주 서서히 죽어갔다. 나는 울다 기절했다. 그것이 옆집 오빠라는 어릴 적 추억의 마지막 기억이다.  





  ◈  


 ◈ 





" 비켜. "



눈앞의 거대한 사람의 밤하늘 보다 더 새까만 눈과 마주하자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되는 일인데 그의 신경질적이기 까지 한 눈동자에 어린 폭력적인 기운을 보고야 말았다. 모른척 하면 좋을텐데. 유난히 그런 쪽으로 예민한 제 감각이 그걸 알아 버렸다. 알고나니 파블로프의 개처럼 즉각적으로 몸에 반응이 왔다. 얼어버린 동상처럼 빳빳해졌다가 이내 온 몸이 떨려왔다. 눈앞의 사람은 저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냥 무심히 지나쳐 갈것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혼자 뭐하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가면 돼. 그러나 꽁꽁얼어버린 몸은 그자리에서 덜덜 떨고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떨어진 것들을 주워야 하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땅만 보며 서있었다. 그러다 제 눈에 그의 발치에 떨어진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아. 사진. 주워야 하는데. 밟고 가면 어쩌지.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제가 보고 있는 것을 그도 발견했는지 무심히 지나쳐 갈줄 알았던 사람은 허리를 주워 그것을 주웠다. 그리고 보았다. 사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돌려주면 좋을텐데. 구기거나 창밖으로 던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냥 버리고 가도 좋으니 제발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다. 아니 내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식은땀흘리며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주운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 조금 오래된 저 사진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엄마의 사진이었다. 엄마와 자신. 그리고 아주 어릴적 기억에 희미하게 남은 옆집에 살던 엄마의 친구분과 그분의 아들. 넷이서 찍은 사진이지만 자신에게는 엄마가 찍혀있는 유일한 사진이었다. 저것 만큼은 무사히 돌려받아야 해! 라고 생각하자 거짓말 처럼 입이 열렸다. 사진을 들고 있는 그에게 돌려달라 말하려는 순간 소리 내어 말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 이거 내 사진인데. "

" 에? "

" 왜 내 사진을 갖고 있지? "



흉흉하기 짝이 없는 거친 눈동자가 사냥감이라도 눈앞에 둔 맹수처럼 어둡게 빛나며 자신을 향해 쏟아졌다. 그 시선을 받으며 당장이라도 숨이 멎고 그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았다. 설마 막 때리고 그러진 않겠지. 떨리고 있던 몸이 눈에 띄게 덜덜 거렸다.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밖에 있는 사람처럼 턱까지 덜덜 떨려왔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런 와중에 무슨 용기가 솟아났는지 덜덜 떠는 목소리로 그러나 확실하게 말대답 하는 자신이 있었다.



" 그거, 제, 사진, 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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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의] 성선설性善說 (w.안은수)




나는 항상 같은 꿈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꾸었다.  꿈에서 깨고 난 후에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이번에 꾸는 꿈도 최근 반복해서 꾸는 꿈들 중 하나 였다. 나는 홀로 춥고 어두운 복도를 걷는다. 복도의 반대편 끝에는 항상 그가 오고있다. 저 멀리,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그림자만 겨우 보일 뿐인데도 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가고싶다.  하지만 꿈 속에서 조차 나는 도망칠 수가 없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기분으로 그의 앞에 설때까지 걷는다.  강제로 한걸음. 한걸음.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등을 떠민다. 어느새 눈 앞에 다가온 그의 발끝만 바라보다가 문득 조금 시선을 올려본다. 왜 올려다 보는 걸까. 그러나 자신은 거기서 항상 올려다 보고야 만다. 고개를 들면 교복 셔츠의 소매자락이 껑충 올라간 얇은 손목과 그 중간에 도드라지게 톡 튀어나온 손목뼈, 그리고 머리위로 뻗어오는 손이 보인다. 그리고 나의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와 함께 앞으로 일어날 악몽같은 일. 악몽같은 일이... 어, 악몽같은 일이 일어나야하는데,ㅡ 평소랑 다르게 얼빠진 낯선 남학생의 곱살스런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품에 보물처럼 끌어안은 네모난 악기가방. 어? 어라? 잠깐? 이게 아닌데? 꿈 내용이 왜이래? 이게 아닐텐데?



"꺢!"



비명도아니고 신음도 아닌 괴상한 소릴 내뱉으며 기상해버렸다. 비명을 지르려고했으나 자느라 목이 잠겨서 그런건지 비명이 목에 걸려서 그런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괴물같은 소리를 내며 기상했다. 벌써 여러번이나 이런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매번 꿈에서 깨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날이다. 그날의 일을 계속 꾸고있다. 잠들기 전에도 몇번이나 떠올라 이불킥을 선사해준 그 날의!



"난 또 악몽인줄 알았는데."



악몽이 아니었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악몽이었다. 아니 악몽까지는 아니지만. 음, 그렇다고 유쾌한 꿈인것도 아닌듯 하다. 무서운 꿈이 아니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매번 그날의 창피함을 되새김질 하는건... 진짜 낯뜨거운 일이다.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데 왜 자꾸 생각이 나는 걸까. 비실거리고 일어나서는 꿈에 관한 생각을 털어버리려 머리를 과하게 흔들며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To. 여기서 부딪힌 여학우에게

안녕

저번에 부딪혀서 미안해

그리고 머리에 손댄 거 삔 떨어지려고 해서 그랬던 거야.

무서워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해.

삔 어쩔 줄 몰라서 내가 가져갔어

오후에 음악실 오면 삔 돌려줄게!

다시 한 번 미안.

From. 2학년 안은수





가만 날을 곱씹어 보니 이런 망측한 꿈을 꾸기 시작한게 그날 이후부터 였던것 같다. 복도에서 기함 할 만한 대자보(그저 A4용지에 적은 쪽지였지만 나에겐 이렇게 느껴졌다)가 붙어있던 것을 발견하고 난 뒤로 자꾸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아닌가 쪽지에 답변을 쓰고 음악실에 삔을 가지러 갔다가 눈이 마주쳐서 도망친 다음 부터 였나. 아무튼 그 즈음부터 였으니 이런걸 따져봐야 소용없다. 그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삔을 받으러 가자니, 얼굴보기가 낯뜨겁고, 그렇다고 몰래 가져오자니 그가 삔을 어디에 두었을지 나로써는 알수가 없고,. 결국은 음악실에 두고 가주길 바랄 수 밖에 없는건가. 한숨을 쉬며 옷을갈아입고 방문 밖으로 나왔다. 


* *


도서실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오후 늦게서야 슬쩍 둘러볼겸 음악실 쪽으로 향했다. 산책하듯 여유있는 걸음으로 음악실이 있는 복도에 들어섰다. 그러나 복도에 들어가기 전에 모퉁이에서 슬쩍 눈만 내밀어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다. 저번처럼 무언가의 악기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갑자기 첩보영화에나 나올법한 몸놀림으로 복도 벽에 착 달라붙어서 슬금슬금 주위를 경계하며 걸었다. 발소리를 내지않고 조용히 걷는 걸음에는 온 몸의 신경이 집중되어있었다. 짧고도 먼길 같던 복도를 가로질러 음악실에 도착했다. 저번처럼 창문으로 들여다 보는 짓은 하지않았다. 꼭 닫혀진 음악실 문을 소리없이 검지손가락 하나 겨우 들어갈 만큼의 넓이만큼만 열어서 그 사이로 안을 살펴보았다. 바람소리만 나는 텅빈 음악실은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안심하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없는 모양이다. 그가 삔을 여기에 두었을지 어쨌을지 모르지만 일단 둘러나 봐야겠다하는 생각으로 들어왔으나 막상 들어오니 지나치게 깔끔하게 정돈된 텅빈 교실에서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교탁앞에 있는 책상 하나뿐이었다.  뒷문으로 들어왔어도 분명 저 책상만 눈에 띄었으리라. 나는 확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 책상 위에만 형형색색한 물건들이 굴러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누군가 이 빈 교실에서 자기 자리처럼 사용해서 저렇게 물건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저건 그렇게 보기엔 누가봐도 내가 여기다 일부러 두었소 하고 말하는 듯한 위화감이다.  그걸 알면서도 자신은 기꺼이 누군가가 만들어논 함정에 다가갔다. 무슨 장난을 해놓았을까.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정말로 그냥 잡다한 물건들을 올려 두었을 뿐, 물건을 만지면 손에 본드가 붙는다거나, 물건을 만지려고 다가서면 책상 다리에 묶어논 실에 발이 걸린다거나, 물건들 사이에 뾰족한 것이나 날카로운 날붙이를 숨겨둔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올려둔 물건'들 이었다. 


왜 올려둔 것일까. 생각하기도 전에 답은 나왔다. 자신이 찾는 것이 거기에 있었다. 마치 이것을 보라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것을 찾지 못하게 숨기려고 애쓴 것도 같고, 어중간한 느낌이었다. 푸훗. 자신의 귀에만 겨우 들릴정도의 작은 웃음이 아주 조금 나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곳에는 그 어리숙한 함정에 사용된 물건들을 정리하고있는 자신의 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얼마 없는 몇가지의 잡동산이 들은 함정을 치기위해 준비했다기 보다는 급하게 급조하느라고 주변에서 억지로 찾아낸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단추들, 몸을 잃은 펜뚜겅, 어디에서 굴러다녔을지 모를 클립들. 차라리 필통같은걸 쏟아 놓았으면 좋았을텐데. 누군가의 어설픔에 웃음이 났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함정을 팠을까 상상하며 물건들을 정열하다보니 그만 이곳에 온 목적을 잠시 잊어버리고있었다. 마치 퍼즐을 풀고 범인을 알아내는 탐정이라도 된 듯한 착각으로 탐정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기."

"히엑!"



정말로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랐기에 아연실색하며 소리가 나는 곳의 반대방향으로 몸을 뺌과 동시에 뒤돌아 보려다가 책상에 있는 그대로 몸을 가져다 박았다. 우당탕. 기껏 정리한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지고 누군가 줄세워논 책상은 혼자만 경로를 이탈했다. 그리고 그자리엔 넘어진 것도 서있는 것도 아닌 어쩡정한 포즈의 나. 슬랩스틱 코미디도 아니고 왜 여기서 몸개그를 시전하냐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엇보다 넘어지려다 만 어쩡정한 포즈가 너무 민망스러워서 재빨리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그 와중에도 제 삔은 확실하게 챙겼다. 흘끔 저를 놀래킨 원흉을 보니 배꽃처럼 하얀 낯익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역시나 범인은 당신이었구나.  하긴 이 사건은 애초에 등장인물이 둘 밖에 없다. 범인도 탐정도 함정도 결국 다 정해져있는 것이다. 



"박은 데 괜찮아? 저기, 미안해! 도망 가지마.."

"..아니. 아니에요. 저 도망 안 갔어요." 


민망함을 감추려 애를 쓰고 있는데 여전히 상냥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 사람은 참으로 해사하다.  그런 밝음에 제 그림자가 비칠까봐 겁이나 제 못남이 부끄러워져 한걸음 뒷걸음 쳐 그와 거리를 두었다.  


“어.. 아무튼; 저번에 그거, 사과하고 싶어서. 싫으면 나도 이제 안 쫒아 다닐 테니까..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다행히도 그는 함정까지 치고 잠복하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조금 바보같을 정도로 눈치는 없었지만 배려는 무척이나 넘치고있었다. 그 넘치는 배려 덕에 더 창피하다는 걸 모른 다는 점에서 역시나 눈치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같으니 서로 모르는체 하는게 좋은 것이다. 


“..아, 혹시 괜찮으면 이름 알려줄래..?”


ㅡ라고 생각하기 3초도 지나지 않아 그가 저렇게 말했다. 처음보는 남학생이 나한테 이름을 묻는다. 그것도 창피를 보인 상대가 묻는다. 첫째, 무시하고 가버린다. 둘째, 쌩하니 도망간다. 셋째, 질문에 답해주고 당당히 걸어간다. 넷째...아 그만하자, 아주 잠깐 뇌내에서 일어난 혼란때문에 생각이 산으로 가고말았다. 다시 정신줄을 잘 잡고는 살짝 시선을 올려 그를 마주보았다.  



“청..산의요.”

"청 산의. 청산의구나."



이름을 말하자 그는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되내여보고는 맑갛게 웃었다. 비가오고 난 다음날 먹구름이 갠 하늘의 느낌과 닮았다. 놀랐다. 저리 티끌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진짜로 있었구나. 책 속에서만 표현하던 문장이 눈앞에 그려져 있는 듯 했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모든게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줄 사람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는 내게 있어 오래된 한가지 편견을 깨트려주었다.


세상에 선한 사람은 없다. X

세상엔 선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O


그것 아주 오래된 나의 고정관념이었고, 선입견이었고, 색안경이었다. 그리고 타인을 판단하는 나의 기준점이었다. 흔들림을 느끼는 순간 나는 확인해 보고 싶었다. 충동적이었다. 



"이름...잊어버렸어요. 다시 알려줄래요?"

"아, 은수. 안 은수야."



그는 기쁜듯해 보이기도 부끄러워 보이기도 하는 얼굴로 뒷목을 겸연스레 만지작 거리며 다시 한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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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수] 분홍색 숨바꼭질 한 철 (w.청산의)

2015.10.01 / WRITTEN BY. 안은수[설레]


나비가 삐뚤삐뚤 나는 건 
꽃을 찾는게 아니라 보기 위해서야

연탄곡 제 4. 청산의
bgm,Summer-Joe Hisaishi

To. 여기서 부딪힌 여학우에게
안녕
저번에 부딪혀서 미안해
그리고 머리에 손댄 거 삔 떨어지려고 해서 그랬던 거야.
무서워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해.
삔 어쩔 줄 몰라서 내가 가져갔어
오후에 음악실 오면 삔 돌려줄게!
다시 한 번 미안.
From. 2학년 안은수

바보처럼 복도에서 남의 얼굴이나 쳐다보다가 발이 꼬여 볼썽사납게 넘어진 만남 이후 은수는 Wanted 지명수배서라도 배부한 심정이었다. 마주쳤던 장소에 A4용지로 써서 붙여두었던 벽보 아래엔 어느 샌가 주인공이 보고 갔는지 분홍 포스트잇에 누가 봐도 여자아이가 쓴 아기자기한 필체가 적혀있었다. 

-음악실에 두면 찾으러 갈게요.-

“왜 그러지.. 곤란하네..”

누가 봐도 너 만나기 싫어! 하는 의사표현이 아닌가. 삔 돌려주는 거야 사실 일도 아닌데다, 저번에 서로 너무 민망하게 헤어진 나머지 사과를 하고 싶으니까 이쪽도 용기내서 붙여둔 건데. 아무래도 당시 제 얼굴을 거의 쳐다보지 못하다가 새하얗던 얼굴이 새빨개져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던 여학생을 생각하니 마치 연약한 소녀를 괴롭힌 것 같은 입장이 된 기분이었다. 바보같이 헤벌레 여학생의 얼굴을 바라봤던 데는 나름의 변명을 하고 싶다. 학교에 화장하는 여자애들은 많지만 대부분 교칙에 걸리니 자연스러운 화장을 주로 하던데, 이 여학생은 뭔가 각 잡은 풀 메이크업이어서 딴에 남학생인 은수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어버버 거리면서도 했던 말대로, 예뻤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아무것도 안 발라도 예쁠 때이니 꾸미면 예쁜 게 당연한데, 그걸 또 제 입으로 당사자에게 말했다는 게 은수도 못 견디게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게다가 소리까지 질렀으니 그 이름도 모르는 귀밑머리 여학생은 혹시 화장했다고 놀렸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도 뭔가 속이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아무튼 여학생이 제 얼굴 보기 싫은 건 완전 100%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남은 시간 내내 이 비좁고 공간이 한정된 학교에서 마주치지 않고 살아가기란 참으로 소원한 일이다. 혜원고 안에서는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두면 정말이지 지옥이 아닐 수 없었다. 전교생은 아닐지라도 3년 동안같이 지내면 동급생이나 후배 얼굴은 눈에 익을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어떻게든 맞닥뜨릴 일이라면 차라리 원만하게 해결 봐야겠다는 마음이다. 

언제나와 같이 음악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조율하고 어깨에 얹는다. 음악실 컴퓨터를 켜고, 먹통인 익스플로러는 눈길 주지 않고 이미 있는 파일에서 Joe Hisaishi의 Summer를 재생한다. 맑고 청아하면서도 쾌활한 여름 하늘같은 이 곡이 어색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진정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유명하니까 혹시 여학생이 알지도 모르고. 조금 친근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남이야 어찌 생각하든, 은수는 바이올린과 활을 마치 검과 방패처럼 들고 비장하게 연주를 시작했다. 교실 밖까지 들리도록 틀진 않았지만 어차피 바이올린 소리는 울려 퍼질 것이다. 홀로 연주하면 멜로디를 맞출 수 없으니 가끔 서우선배라던가, 피아노 부원들이라던가, 합주 할 사람이 없으면 이렇게도 연주했다. 본래 피아니스트를 위한 곡이니 바이올린이 없어도 완벽한 곡이지만, 적절히 화음을 섞거나 화성을 이루어 긋는 재미가 있다. 그러니까 은수는 Summer라는 곡의 악보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재생하면, 알토의 내림음을 조화롭게 찾을 수 있었다. 자유편곡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악기를 가지고 놀기엔 더할 나위 없는 방식이다. 피아노와 같은 멜로디를 켜기도 하고, 포지션을 높이거나 낮추면서 그때그때 음이 맞아 들어가는 제 연주를 같이 느끼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켜고 있는데 감았던 눈을 살짝 뜨자, 공교롭게도 여학생이 창문에 붙어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공들인 티가 나는 도르르 말린 단발머리는 주인이 폴짝 뛰자 낙하산 펴지듯 같이 동그랗게 붕 떴다 가라앉았다. 

“엇.”
“ ! ”
“아, 안녕. 듣고 있었구나!”
“ ...!”
“엥?”

잠시 연주를 뚝 끊고 교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여학생은 후다닥 볼을 붉히고 냅다 음악실 반대편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기?!”

황망하게 저 혼자 음악을 잇는 피아노곡 소리만 열린 교실 문을 통해 흩어져나간다. 은수가 바이올린을 내려두고 옷 주머니에서 삔을 꺼내들고 따라 나갔지만, 이미 여학생은 젓 먹던 힘까지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이거- 삔 가져가야지..!”

은수가 항복표시인지 비행기 착륙시 안내수신호인지 팔로 크게 호선을 그리며 인질의 무사함을 알렸으나 여학생은 작전상 후퇴인지 뒤도 안 돌아보고 내달렸다. 본래 그렇게 심히 뛰어다니진 않는지 헥헥 숨까지 몰아쉬며 벌써 복도 저 끝 코너까지 뱅글 돌아 사라져버렸다. 단발머리만 공중에 휙 날리는 걸 간신히 봤을 뿐이었다. 따라 쫒아 가면 잡을 수 있었겠지만, 이미 상대는 놀란 토끼처럼 튀어나갔는데 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긴 싫었다. 고민하는 와중에 산의는 이미 자취를 감췄다. 

“......모야..”

진정한 후 만나서 순조롭게 한두 마디라도 하고 어서 털어버리려고 했던 은수의 생각과는 달리, 여학생은 전혀 달리 해석한 것 같았다. 그 쪽팔린 일을 당하고 너를 만나느니 차라리 니가 졸업할 1년 동안 미션임파서블 뺨치게 피해 다녀 주겠다. 라는 선고를 들은 기분이다. 은수는 괜히 울적해져서 추욱 쳐져 삔을 들지 않은 한 팔을 허리에 짚고 일이 분쯤 더 산의가 사라진 방향을 멍 때리고 보고 있었다.
음악실에 들어와서 이 척박한 상황에서 밝고 기쁘게 울리는 피아노곡 재생을 끄고, 사태를 정리하기로 한다. 도망을 쳤으면 쳤지 제가 도망쳐야할 상대가 되어본 일이 없으니 은수가 이런 상황에 면역이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삔만 주고 끝낼까. 아, 그래도. 아.. 뭐 어쩌지.’

그리하여 안은수(술래, 18세)는 다음의 작전을 짜게 된 것이다.
어차피 오후의 음악실에 있을 때는 제가 자리를 비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쬐금 약삭빠르고 야비하긴 하지만 제가 없을 적엔 삔만 남겨 두진 않았다. 여학생이 삔을 손에 넣으면 더 이상 저 같은 녀석에게 볼 일이라곤 정말 졸업할 때 까지도 없을 일이다. 애초에 삔까지 포기하게 될지 모르니까, 기회가 언제까지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고로! 음악실 컴퓨터교탁 바로 앞의 책상 위에다 여러 가지 잡동사니와 초콜릿과 삔을 흐트러뜨려 놓고, 자신은 커다란 컴퓨터교탁 뒤에 숨어있기로 했다. 

은수가 쥐덫에 치즈를 올려두듯 알록달록한 색깔의 단추며 팬 뚜껑이며 클립 같은 것들을 놓으면서 어색하게 교탁 뒤에 숨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핸드폰으로 육각2048 게임의 5X5 정사각형 숫자판에서 [8192]박스를 만들 때 쯤, 교실 밖 복도에서 타박타박 걷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로 가늠할 때 나긋나긋한 걸음걸이의 울림은 남학생의 발소린 아닌 것 같다. 은수는 서둘러 핸드폰 불빛을 끄고 홀드를 걸었다. 굳이 온몸을 찌그러뜨리지 않아도 교탁은 충분히 어른도 가릴 정도의 크기였지만, 어설프게 들키기는 죽어도 싫은 안은수였다. 교탁 뒤에 몸을 움츠리고 찰싹 붙어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는다. 

살금살금 들어오는 모습이 컴퓨터 모뎀박스 유리창에 비친다. 빙고! 베이지색 가디건을 걸친 여학생이다. 오늘은 기필코 제대로 사과를 하리라! 여학생은 교실을 두리번거리고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곤, 삔만 찾아 은수가 돌아오기 전까지 나갈 요량인지 다른 경계 없이 들어온다. 베이지색 컨버스화가 종종걸음으로 교탁 앞 책상에서 멈추더니 책상위에 너저분~하게 누가 쏟아둔 듯 한 물건들 사이에서 별모양 분홍 삔을 찾아내고 한숨을 폭 쉬었다. 삔을 찾는 손길이나 막상 들어와서는 버둥대지 않는 모습을 보니, 원래 꽤 느긋한 성미인 것 같았다. 

은수가 지금이 그 때인 것 같아 정체를 드러내려고 교탁에서 일어났는데도, 산의는 뒤의 인기척보다 다른데 정신이 팔렸는지 그대로 책상 앞에 서서 뭔가 만지작대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색색 깔별로 삔을 숨긴 데 썼던 잡동사니들을 그러데이션처럼 가지런히 정리 하고 있었다. 뭔가.. 강박증이라도 있는 거야?! 은수는 산의가 열심히 희고 고운 손으로 쪼그만 물건들을 일렬종대시키고 줄 세우는 것을 미소 띠고 바라보다가 드디어 입을 땠다.

“저기.”
"히엑!"

예상했던 대로 화들짝 놀란 산의는 곧바로 뛰쳐나가려다 책상에 몸을 퍽 부딪쳤다. 바로 그 흰 얼굴에 창.피.함. 하고 써지는 것 같았다. 퇴로를 막고 서있던 은수가 움찔할 정도로 꽤 소리가 커서 곧바로 급히 덧붙였다. 보아하니 여학생은 싫은 티도 못 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벌 받는 것처럼 서서 두 집게손가락으로 삔을 꼭 쥐고 있다. 갑작스런 등장으로 한 번 눈을 딱 마주치더니, 그 뒤론 의식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던가 해서 눈 마주침을 피하는 것 같아 은수는 그 풍성하고도 짙고 검은 마스카라만 홀린 듯 쳐다보다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였다. 

“박은 데 괜찮아? 저기, 미안해! 도망 가지마..”
“..아니. 아니에요. 저 도망 안 갔어요.”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

“어.. 아무튼; 저번에 그거, 사과하고 싶어서. 싫으면 나도 이제 안 쫒아 다닐 테니까..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어랏. 이런 데엔 또 확실하게 자기 의사를 전달해온다. 아무튼 명확하게 괜찮다고 하니 사건의 마무리는 된 것 같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은수가 버릇처럼 흠칫했다. 오늘은 바이올린을 켜지 않아서 또 뒷목에 송진을 처바르진 않은 모양이다. 버티고 서서 제가 할 말을 다 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 수줍은 여학생에게 더 이상의 실례를 저지른다면 이번엔 제 몸 못 가누는 멍청함뿐만이 아니라 비매너로 찍힐 것 같아서, 은수는 지레 떨며 한단 위로 올라서 길을 열어주었다. 살짝 웃기조차도 어색한 공기가 뚝뚝 떨어져서 그냥 가만히 잡았던 산새를 다치지 않게 놓아주는 격이었다. 숲속에서 사냥꾼에게 쫓기던 밤비를 만나도 이보단 숨쉬기 편할 성 싶었다. 이제 자기까지 부끄러워지는데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물었는지 은수는 정말 몰랐다. 

“..아, 혹시 괜찮으면 이름 알려줄래..?”

살포시 고개를 드는 얼굴엔 왠지 모를 민망함과, 다신 얘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는지 조금은 안심하는 듯 한 기색과, 그건 왜 물어보냐는 눈빛이 한데 뒤섞여 은수에게 돌아온다. 고개는 들었는데 어째 여학생의 눈동자는 제 코까지만 올라온다. 은수쪽에서 고개를 3센티만 내리면 눈높이가 맞을 것 같았지만, 그런 허락은 받지 못했으니까. 싫으면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분홍과 레드의 중간색이 발린 도톰한 입술이 움직인다.

“청..산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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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주] 여학생 두 사람. (with 청산의)
2015.09.19 / WRITTEN BY. 한기주[톰]


미술실로 향하며 기주는 입술의 얇은 피부가 오늘따라 당기고 버석거리는 것이 계속 신경 쓰였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 것일까 최근 기분이 좋지 않아서일까. 마침 앞에 화장실이 보였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이 학교는 시설이 좋은 것이 장점이다. 큰 거울 앞에서 화구가방을 내려놓은 기주는 화구가방에 매달아 놓은 작은 손가방을 떼어냈다.

지퍼를 열려고 하자 바로 자신이 들어온 문이 벌컥 열리더니 들어오는 여학생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반사적으로 거울을 보자 등 뒤로 먼저 들어온 사람에게 자연스레 시선을 주던 여학생을 눈을 마주쳤다. 제대로 눈을 마주쳤다는 인식을 하기도 전에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 여학생은 기주에게서 세면대 하나 더의 간격을 두고 거울 앞에 섰다.

단 둘 뿐인 공간은 묘한 불편함이 맴돌았고 기주는 자신의 머리삔을 매만지고 마스카라로 다듬은 속눈썹을 살피는 산의를 의미없이 살폈다. 자신은 화장을 하는 것이 드문 편이기에 잘 꾸민 여학생들에게는 어쩐지 시선이 향하고는 했다. 다만 산의는 그런 시선이 불편한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기주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더 이상 산의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산의가 파우치를 꺼냈을 때 기주는 다시 산의에게 시선을 주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 손과 손에 들린 파우치에. 기주는 자신의 파우치를 한번 들여다 보고는 산의가 서 있는 왼쪽에 옮겨 내려두었다.

'몰랑이네.'

'몰랑이다.'

산의의 파우치와 기주의 파우치에 자리잡은 마스코트는 기묘하게도 취하고 있는 포즈까지 같다. 그래, 저 일러스트가 좀 귀엽기는 하지. 하고 긍정하며 산의의 파우치를 곁눈질 하던 기주는 곧 옆에 선 여학생의 파우치가 자신의 것과 색만 같은 것이 아니라 질감, 무늬, 크기까지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니까 그냥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같은 제품이었다. 기주가 그것을 알았을 때 산의도 기주와 같은 생각을 했고 곧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파우치를 물끄럼이 보고 있음도 눈치챘다. 반사적으로 두 사람은 민망함에 서로의 파우치에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 민망함은 수치보다는 유쾌에 가까운 것이어서 기주는 산의의 입에서 작게 새어나오는 바람같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기주도 작게 웃었다.

"그거 한정판인데."

파우치에서 립밤을 찾을 때 옆에서 산의가 작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혼잣말이라기에는 기주의 파우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흘긋 옆을 보니 산의는 거울 속에 자신과 함께 거울 속의 기주를 한번씩 살피고 있었다.

"선물 받았어."

기주도 거울 속의 산의에게만 가끔 시선을 주며 입술을 매만졌다.

"남자친구한테?"

"있으면 좋을텐데."

지금 남자친구가 딱히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야깃거리가 없을 때는 좋은 소재로 쓸 수 있기는 하다. 파우치를 얻은 경로에 대해서는 더 궁금하지 않은지 입꼬리를 올려 웃는 소녀는 자신의 입술에 그라데이션이 예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너도 선물 받았어?"

"난 직접 샀어."

"예약했었어? 아니면 선착순 안에 들었었어?"

"선착순은 너무 확률도 낮고 변수가 많아서."

선예약 주문자라니 이건 자신보다 더 급이 높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생각보다 번들거리지 않는 입술에 립밤을 찍은 손가락을 더 문지르며 기주는 입술을 한번 벙긋거렸다. 치장이 끝날 때까지 둘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먼저 볼일을 마친 기주는 파우치를 닫아 손가방 안에 넣었다. 짧게 대화를 나누었으니 작별인사까지 하는 것이 맞을텐데 인사를 건넬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있을 때 산의가 먼저 고개를 살짝 기주 쪽으로 틀었다.

"안녕."

"안녕."

다음에 보자는 말은 뒤따르지 않았지만 단편적임에도 호의적인 만남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손을 들어 인사를 하는 것은 어색했지만 손을 들어올려 흔들자 함께 손을 들어올려 흔드는 상대방의 응수는 퍽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기주는 조금 가뿐해진 걸음으로 미술실을 향해 걸었다.














[민이레] 실수는 선물로 보답하기 (with 청산의)

2015.09.18 / WRITTEN BY. 민이레[솔]


 
“넌 공부는 대체 언제 하냐?”

같이 방을 쓰던 녀석은 하루의 반을 잠으로 때우는 듯한 이레를 보면서 그렇게 물었더랬다. 그에 이레는 말도 안 되는 걸 묻는다는 것마냥 대꾸했었다.

“공부? 그거 언제나 열심히 하잖아.”
“음악 외엔 바닥을 치면서 말은 잘한다? 맨날 잠만보처럼 잠이나 퍼 자면서.”

그는 매번 시험 기간만 되면 제 옆에 달라붙어서 공부를 도와주는 이였다. 사실 도찐개찐이면서 그래도 이레보다는 그나마 성적이 높다고 마치 어미 새마냥 이것저것 챙겨주며 가르치려 들었다. 그럴 때면 이레는 늘 과장된 제스처로 놀란 척을 하면서 검지를 세워 까닥까닥 흔들었다. 물론 고맙기야 했지만.

“바닥이라니 그렇게 섭섭한 말을, 나름 종합적으로는 평균 안에 드는 몸이야. 난 평범한 게 좋아, 평범한 게. 무난하게 학교 다니다가 그럭저럭 졸업해서 어영부영 회사 들어가고 어쩌다가 여자 하나 만나서 원활한 가정을 꾸리고 그렇게 평안하게 오순도순 살다가 죽는 거지.”

이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꿈은 그랬다. 책에서나 나올 법한 일상적인 가정, 크게 모난 데도 없고 어그러진 데도 없는, 그저 둥글둥글하기만 한 삶이다. 그런 꿈에는 특출 난 무엇도, 독특한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쉬웠지만 또 어떻게 보면 가장 어려운 꿈이기도 했다. 철푸덕 하니 책상 위로 엎어져서 나무늘보처럼 길게 늘어지는 이레를 보고 그는 고개를 설레 저었다.

“어이구, 그러세요? 장하네요, 우리 이레씨. 인생이 그렇게 뜻대로 되겠냐.”
“안 되면 되게 하라. 누가 그랬잖아. 거 누구야.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좋아하네. 네 자신이나 좀 알아라.”
“난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엣헴.”
“퍽이나.”

.
.
.

이레는 잠에 취한 눈을 끔벅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지 싶었다가 주위를 둘러보고서 양호실인 걸 알았다. 그러니까 손을 베여서 데일 밴드를 찾으러 왔다가 흰 침대가 유난히 눈에 띄어서 저도 모르게 누웠는데 그대로 자버린 모양이었다. 양호 선생조차 없어 텅 빈 양호실에서 눈만 꿈벅꿈벅 감았다 뜬다. 몽롱하게 흐려진 초점은 반쯤 잠에 빠져 있다는 걸 증명하듯 또렷하지 못했다. 이레는 한 박자 늦게 방금 전의 대화가 꿈이었다는 걸 인지했다. 매번 같은 대화로 투닥거리던 그 때가 왜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생각이 났다기보다는 왜 그때의 일을 꿈으로 꾼 건지 모르겠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고민에 빠져 있다가 한참 뒤에야 결론을 도출해냈다. 저는 이렇게 학교에 갇혀 있는데 홀랑 버스 타고 집으로 가버린 친구 놈이 괘씸했던 탓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면 그저 놀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맨날 투닥거려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레는 양호실 침대 아래로 훌쩍 내려섰다. 엉망이 된 침대를 잠시 보다가 슬그머니 대충 잡아 당겨서 시트를 정리한다. 옆에 놓아 두었던 데일 밴드-붙여야 한다는 건 이미 잊었다-를 챙기고서 양호실에서 나가기 위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독 컸다. 추운 복도를 거닐면서도 잠에 취한 정신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야 하는데 왜 벌써 일어났냐고 어필하는 것마냥 어디든 누워서 자라고 성화를 부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게 자다 딱 동사하기 십상이니 어떻게든 기숙사까지는 가야 한다. 이레는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졸리다, 졸려. 하트 여왕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가서 자야지. 비몽사몽 한 상태로 어딘가에서 봤었던 대사를 속으로 읊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았다.

빠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발에 무언가가 밟히는 느낌이 난 건 그 때였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무심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들었는데 또 바로 지척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갈색의 짧은 단발 머리를 한 그녀는 상체를 반쯤 굽히고서 어정쩡하게 손을 뻗고 있었다. 가늘게 뻗은 손가락을 보고 오, 예쁜 손이네. 하고 무심결에 생각했다가 고개를 들어서 머리에 꼽힌 분홍색 머리핀을 보았다. 그리고 화장을 했지만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도 보았다. 카라에 꽃무늬가 수놓아진 흰색 셔츠부터 시작해 베이지색 가디건과 검은색 플레어 스커트에 레깅스까지 시선을 내렸다. 종국에는 그녀가 신은 베이지색 캔버스 화를 지나서 그녀의 시선이 닿아있는 제 신발까지 도달했다.

“……어?”

이레는 내디뎠던 한 발을 조용히 그대로 들었다. 작은 조각이 신발 밑창에 붙어 있다가 툭 하고 떨어졌다. 발에 밟혀 재주 좋게도 박살 난 틴트가 그 자리에 있었다. 발간 틴트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누가 봐도 그녀는 떨어트린 틴트가 굴러감에 그것을 주우려 쫓아오던 차였고, 그것을 지나가다가 밟아버린 것은 이레였다. 깨닫는다 해서 부서진 틴트가 제 모습으로 돌아올 리는 없었지만. 이걸 어쩌나 싶어 멍을 때리고 있는 그녀의 앞에서 이레는 뺨을 검지로 긁적이며 발을 치웠다.

“미안해? 음, 미안해.”

그래도 일단은 제 잘못이겠거니 해서 사과를 건넸다.

“아뇨, 괜찮아요.”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굽혔던 몸을 바로 세웠다. 연한 갈색이다. 제게 들린 그녀의 목소리는 마른 가을의 낙엽처럼 그러한 색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어쩐지 슬그머니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이레를 쳐다 보고 답했다. 그래서 빤히 보고 있노라면 그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지 티는 안 내려고 애를 쓰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마주 엮였던 시선은 곧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서 제 눈을 피했다. 이레는 그런 그녀를 계속 쳐다보다가 한번 더 입을 열었다.

“그러게 왜 흘리고 다녀. 아니면 내게 주의를 주던가 했어야지.”
“……제가 부주의했기 때문이니까요.”
“어쨌든 밟은 건 내 쪽인데.”
“제 실수였어요.”

부러 그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말해본 것뿐이었는데 그녀는 즉각 도리질쳤다.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마냥 애써 끝맺음을 한다. 문득 자신이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타입인가 싶었으나 아마 그녀의 성정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까지는 그냥 지나가도 되는 문제였으니 자신이 신경 써줄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
“아, 잠깐만.”

이레가 더 이상 말이 없자 그녀는 무례해 보이지 않도록 적당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니, 건네려 했으나 이레는 그녀의 말을 자르면서 제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손에 잡히는 것을 무작정 꺼내자 휴대폰과 머리핀 몇 개, 그리고 데일밴드가 잡혔다. 이번에는 다른 쪽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왜 있는지 모를 펜과 립밤이 있었다. 이레는 립밤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넣고서 립밤은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새 거니까 줄게. 한번도 안 썼어.”
“괘, 괜찮아요. 정말.”

그녀는 갈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이레는 생각을 바꿀 마음이 아예 없는 모양이었다. 

“응, 나도 괜찮아. 그러니까 여기.”

그렇게 기어이 그녀의 손에 립밤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곤란한 듯 어색한 듯 손바닥에 옮겨진 립밤을 쥐었고, 이레는 그제서야 만족한다는 듯이 신발 바닥에 묻은 틴트를 닦듯 바닥에 발을 몇 번 문지르고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어느새 잠이 깨버렸다는 사실을 느낀 건 그 다음이었다.




















[청산의] 살어리 살어리 랏다.

2015.09.14 / WRITTEN BY. 청산의[푸름]





도시와 떨어져 고립된 학교. 기숙사제. 소설이나 만화에 많이 등장하는 요소이지 않을까.
무언가 평범함과는 다른 것이 있지는 않을까, 쳇바퀴 마냥 돌고 도는 일상에 색다른 설렘을 주지않을까 하는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입학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겨울 방학이다. 상상과는 다르게 막상 들어온 학교는 평범하디 평범한 학교로 똑같이 공부 잠 공부 잠 뿐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기숙사 생활은 굉장히 흡족스러웠다. 첫째, 방과 후에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둘째, 방학 중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셋째, 졸업 할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는 점. 다른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이미 여름방학을 한번 지내보고 난 뒤라 두번째 맞이하는 방학에 살짝 들떠있기까지 했다. 겨울방학은 여름방학 보다 훨씬 기니까. 겨울 밤은 여름의 밤 보다 훨씬 기니까.

운동장에 남은 바큇자국을 내려다 보고있다가 이내 창에서 고개를 돌렸다. 차들이 떠난 자리에는 어린아이가 스케치북에 장난스럽게 그려놓은 낙서같은 그림자국만 남았다. 낙서를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들어있는 쪽지가 생각났다. 부스럭. 손을 넣어 만져보니 분명히 들어있다. 쪽지를 발견한건 정말 우연이었다. 누군가 흘린 듯이 도서실 책상 위에 떨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보느라 펼쳐둔 책 위에. 아주 잠깐 몇초 졸았을 뿐인데 눈 떠 보니 책위에 쪽지가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것이 누군가 나에게 보내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쪽지를 챙겨온건 순전히 변덕이었다. 비뚤어짐 없이 반듯하게 두번으로 접힌 쪽지. 그안에 적힌 내용이 흥미로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두려워 했고
그는 살아 숨쉬는 우리를 비웃었고
그는 우리들을 잃어버리고서도 자신의 슬픔만을 생각했으며
또 그는 슬퍼할 우리를 외면했어」


맞아. 그는 우리를 외면했어. 나는 무슨 뜻으로 적힌 글귀인지도 모르면서 멋대로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서 생각했다. 마치 누군가 내 얘기를 써놓은 듯 했다. 두리뭉실하게 돌려말해 간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사실 무엇을 대입하든 얼추 끼워맞추기가 가능한 글이었다. 그러니 딱히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읽는 내가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지. 또 그것과 별개로 쪽지가 어떻게 책 위에 놓아져 있었을까 생각하면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버스가 떠난 이후에 도서관에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내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남아있는 학생들중 누군가가 장난친 것 이라고 생각했다.  


「더럽게도 그는 우리를 몰아넣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더니
결국엔 우리를 죽였어」


모두 떠나고 인적이 드문 학교. 아무도 없는 도서관. 혼자 졸고있는 학생. 누가 봐도 장난치고 싶어지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써놓았다고 겁에 질려 벌벌떨면서 두리번 거리거나 울면서 기숙사로 뛰쳐가는 일은 없다. 딱히 귀신이나 요괴같은 것을 믿지는 않으니까. 귀신 얘기는 그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지 무서워 하는 편이 아니었다. 쪽지를 발견한 후 읽고난 뒤 덤덤하게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읽던 책은 제자리에 꽂아 정리하고 기숙사로 돌아갔을뿐이었다. 숨어서 지켜보고있던 사람이 있었다면 싱거운 반응에 실망하며 돌아갔겠지. 부스럭. 주머니 속에서 의미없이 쪽지를 만지작 거리면서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결국엔 우리를 죽였어」


그 구절이 계속해서 어딘가에 남아 맴돌고 있었다. 




                  ◈         ◈         ◈




도서관에 갔다가 문이 잠겨있어서 남아계실 선생님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묘한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방학하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놓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까봐 눈깜짝할 사이에 다들 하산하고 교내에 남아있는 것은 몇 사람 없을 것인데. 평소와 같은 소란이라고 하기에는 수군거림 사이에 뭔가 이질감이 서려있었다. 평소처럼 무시할 법했으나 그것이 궁금함을 자극했다. 무슨 얘기냐고 말을 거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그저 지나치는 척 얘기를 엿듣기위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다가가보았지만, 어느 새 수군거림도 인기척도 사라지고 없었다. 별일 아니었겠지. 또다시 혼자가 되어 괜시리 발을 구르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작게 발길질을 하였다. 분명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방학 이후 여즉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계속 방안에만 있었던 제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혼자여도 외로움을 타거나 무섭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쌓인 운동장이 보였다. 

왜 그랬을까. 아무도 없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운동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옷깃 사이로 칼날처럼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기위해 카디건을 여미고 양손으로 팔짱끼듯 양팔을 감싸안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좋았다. 누구의 발자국일까. 누군가가 걸어갔다가 뛰어서 되돌아 온 듯한 발자국을 보았다. 걸어가다가 왜 뛰어서 돌아갔을까. 추워서일까. 그 발자국이 가는 방향으로 발자취를 훑듯이 나아가자 하나, 둘, 늘어나는 발자국이 무수히 많아졌다. 마치 누군가 여럿이 다녀간것도 같았고, 누군가 혼자서 이리저리 사방을 헤매고 다닌것도 같아 보였다. 그리고 무수한 발자국들의 한가운데에는 봉긋 하게 솟아오른 하얀 무덤이보였다. 왜 눈이 저기에만 쌓여있을까. 눈사람을 만들려고 했던 걸까. 눈을 치우려고 했던걸까. 조금 더 선명히 보일 정도로 다가서자 새하얀 눈 사이로 이물감을 주는 것이 묻혀있었다.

파랗고 검게 꽁꽁 얼어붙은 손. 그래. 저건 손이었다. 그것도 사람의 손. 

왜 나는 쌓여있는 눈들을 보고 무덤이라고 생각했을까.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 당혹스럽게 눈앞에 다가왔다.
설마 진짜 죽은걸까. 지금이라도 119에 신고하면. 그냥 쓰러져 있는 것뿐일지도 모르고. 설마 죽었겠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는 달리 선뜻 만져서 확인해 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왠지 그냥 만지끼 껴려 졌다. 별것아니지만 꺼림칙함에 본능이 먼저 반응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한눈에 보아도 온기라곤 일말의 여지도 없어보이는 시퍼렇게 얼어붙은 사람의 손이란 누가봐도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 한번 만져보고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런데 만지기 싫었다. 이상한 감정이다. 결국 나는 두 내적갈등의 충돌에 의해 앞으로 손을 뻗어 검지만으로 꽁꽁얼어붙은 손을 쿡 찔러보았다. 마치 냉동실에 얼어있는 동태같은 감촉이었다. 딱딱한 나무토막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정확히 비유를 들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굉장히 충격적으로 불쾌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그렇다는건 역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람은 진짜 죽어있는... 


「결국엔 우리를 죽였어」


눈앞에 죽어있는 사람. 의문의 쪽지. 고립된 학교. 끊어진 연락수단. 갇혀있는 사람들. 
이건 떡밥이다. 추리소설이 시작하기 직전에 뿌리고 시작하는. 나는 누군가의 게임에 참가한걸까. 아니, 스스로 굴러 들어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 누군가가 원치 않는 개입이라면 나는 눈 앞의 사람처럼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그저 등산하러 왔다가 지병이 있어 쓰러져 왕래하는 사람이 드문 탓에 추위에 동사한 것 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나는 지금 과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야만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테니까. 나는 추운것도 잊은 채, 여전히 하얀 무덤을 보고 서서 그것이 현실임을 인지할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꿈이던 현실이던 무언가 꺼림직한 느낌이 가슴 한켠을 싸하게 두들기고 지나갔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나비가 되어, 차갑게 시린 하얀 도화지 위에 서서 하염없이 눈앞의 하얀 무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저 하염없이. 하염없이. 








[청산의] 부끄러움 (w.안은수)
2015.09.15 / WRITTEN BY. 청산의[푸름]


교내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아서 몇걸음 걷다보니 복도 맞은편에 누군가 걸어오고있었다. 모르는 남학생이었다. 방학동안 남아있는 학생들 중 한명이겠지. 방학 이후 처음 마주친 사람이었다. 그는 걷다가 갑자기 제자리에 섰다. 왠지 이쪽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제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저가 스쳐 지나가려는 타이밍에 그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부딪치고 말았다. 남학생은 저와 부딪히며 몇걸음 뒤로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와중에도 그는 품에 든 가방이 무척이나 소중한듯 꼬옥 끌어안은 채였다. 부디친건 이쪽이었는데 넘어진 것은 저쪽이다. 보통은 여자아이쪽이 넘어지는게 아니었던걸까. 자신이 그렇게나 강력한 몸통박치기를 모르는 남학생에게 행하였다고 생각하니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건 마치 사람들 많은 도로 한복판에서 대자로 넘어진것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 넘어진건 저쪽 사람이었고 자신은 서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게다가 성별이 남자인 사람과는 살면서 말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공학이었지만 남학생들은 여학생들보다 더욱 대하기 어려웠고 짖궃은 장난에 괴롭힘만 당한 기억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고등학교도 기숙사제인 여고를 희망했지만 원하는 기준에 차는 곳이없었고, 가장 마음에 든 이곳은 공학에 남녀 합반이었지만, 평소 생활에서 그리 많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 기숙사도 따로 쓰고. 그런데 이성과의 첫만남이 이렇게 창피스러운 일일줄이야.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싶은 생각뿐이었지만 우선 잘못한 쪽에서 먼저 사과부터 해야한다.


"죄송합니다."
"아,아니야...내가 미안해. 내가 얼굴을 보ㄷ...아니, 멍하니 서있었는걸."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부딪쳤는걸요.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주의했어야했어요,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 응, 괜찮아!"


한사람은 앉아서 한사람은 서서 서로에게 사과를 하는 콩트같은 상황이 잠시 지나갔다. 자신이 아래쪽에 있는 남학생에게 사과하기 위해 낮은 곳까지 허리를 접어야 했기에, 넘어져있던 그는 그제야 아직도 자신이 넘어진채로 찬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벌떡일어났다. 일어나니 자신보다 머리하나 정도만큼 키가 큰 남학생을 무심코 올려다 보다가 동공이 보일만큼 밝은 갈색 눈동자 두개와 시선이 마주쳤다.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표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눈알만 굴려 시선을 피했다. 음. 눈이 마주쳤던걸 알았을까? 아니 그래도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거기다 유난히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있는것 같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흐르는 것같았다. 손 안쪽이 바짝 타들어 가는것 같아 괜스레 손가락 끝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신발 안에서 발가락도 꼼지락 거렸다. 그러면서 최대한 태연한척 하고있었다. 시선을 내린곳에 아까 남학생이 넘어지면서도 꼬옥 안고있던 가방이 보였다. 검은 네모모양의 그것은 악기가방 같아 보였다. 저정도 크기와 모양이면 악기가방일것같다. 그중에서도 들어갈만한 거라면 바이올린 같은걸까. 말 걸지 말고 그냥 인사만하고 뒤돌아 뛰어갈까도 생각했지만, 우선 그의 시선을 분산시켜야겠다고 생각해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열었다. 


"악기가방인가요?"
"응. 맞아. 바이올린."
"그렇군요."


역시나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니 남학생의 시선이 얼굴쪽에서 자연스럽게 가방쪽으로 옮겨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짤막한 대화 후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딱히 인간관계를 안하려는건 아니지만, 대화를 하는 것에 있어 서툰 점은 어쩔 수 없었다. 더더욱이 상대방이 모르는 남학생이라면. 어쩌지. 이제 가도되는 타이밍일까. 싶은 생각으로 언제 발을 움직이면 좋을지 제고 있을 찰나, 남학생이 다시 내 얼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걸어왔다. 


"어, 한번 볼래?"
"아니요."
"아 그래..."
"네."


단호하게 거절의 말을 하는 바람에 또 다시 대화가 끊겨 어색한 침묵으로 대치중이었다. 왜 자꾸 쳐다보는걸까. 혹시 얼굴에 뭐가 묻어있나. 아까 먹은 크림빵이 묻었나. 뭐가 붙었나. 머리카락을 먹었나. 설마 코털이 나왔나. 도대체 왜 저렇게 직선으로 바라보는 거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저렇게 올곧게 바라볼 수 있는걸까.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져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서있는 건지도 왜 이러고 있는건지도 모르겠을 즘에 남학생이 갑자기 손을 머리 쪽으로 뻗어오는 바람에 굉장히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왜 손을 뻗는거지! 온몸이 뻣뻣해질 만큼 긴장해버린 채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리고 굳어있는데, 금세 손을 내린 남학생의 입에서 포탄이 날아오는 듯한 발언이 얼굴로 날아왔다. 


"아, 미안! 놀랬어? 얼굴이...아니, 속눈썹이 너무 길어서 예뻐서... 아! 아니 신기해서보는데 머리에 삔이 떨ㅇ..."
"꺢!"
"어져????"


그는 삼키듯 단어를 급히 얼머부려 버렸지만 이미 확실하게 단어를 듣고 난 후였다. 남학생이 했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머리에 과부하가 왔는지, 이해하는 바람에 과부하가 왔는지 얼굴에 열이 몰려 뻥! 하고 터질것만 같았다. 예쁘다니! 분명히 예쁘다고 했어! 예쁘대! 뭐가 예쁘다는 거지! 당황스럽고 부끄러움에 어쩔줄을 몰르는 채로 괴상한 소리를 낸채 제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고 무작정 달려도망갔다. 뒤에서 남학생이 부르는것 같았지만 못 들은 척 하고 더 빨리 뛰어서 도망갔다. 너무 너무 창피했다. 자신이 화장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만 같았다. 아침에 완벽하게 마음에 들때까지 좌우 길이 굵기 까지 완벽히 똑같이 맞춰 그리고 나온 얼굴이 어떻게 보였을지 너무나 창피했다. 마스카라가 뭉쳤거나 아이라인이 번졌으면 어떡하지. 화장이 떴으면 어떡하지. 그걸 봤으면 어떡하지. 두 번 다시 아까의 남학생하고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마 내 얼굴을 기억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어떡하지. 오늘의 일은 평생 밤마다 이부자리를 발로 뻥뻥 차 제낄 흑역사 였다. 


"ㅡ떨어졌는데, 삔... 어떡하지..."




                                                 ★               ★              ★




한참을 도망쳐 기숙사로 돌아가 제 방에 숨고나서야 안심이 되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 진정된 후에야 일어나 떨리는 다리로 겨우 걸어 기숙사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는 두손으로 콩콩콩 애꿎은 베개만 때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평소의 맥박수를 찾은 후에야 일어나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정리하기위해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을 보니 바로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가지런히 정렬되어있던 분홍색 삔 하나가 없어졌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들 중 하나였는데. 도대체 어디서 잃어버린걸까.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어서 무언가를 분실하는 경험이 적기는 하지만, 개중에서도 유난히 똑딱이 삔은 이상하게 잘 없어지는 편이었다. 역시 그냥 실 삔이나 집게 삔을 살걸 그랬다. 오늘은 살면서 몇없는 일들을 한꺼번에 겪은 날이었다. 갑자기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옷이 구겨지는 것을 못참아해서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절대 옷을 입은 채 자거나 하지않았지만, 오늘은 당장 잠들고 싶었다. 그래서 빨리 오늘 있었던 일들을 잊고싶었다. 달콤한 꿈들이 시름을 잊게 해줄 것이다. 억지로 오지않는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고집스럽게 감고 숫자를 세었다. 1. 2. 3. 4. 5...  


숫자를 세고 있는데도 자꾸 남학생의 껑충 올라간 소매에 드러난 손목과 도드라진 손목뼈가 생각이 났다. 









[청산의] 훔쳐보기 (w.신루아)
2015.09.17 / WRITTEN BY. 청산의[푸름]





탁. 사박사박. 탁. 사박사박. 작지만 분명한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퍼졌다. 

책을 읽는 것에 열중한 나머지 누군가 도서관 내에 들어온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넓은 공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책장에 소리가 부딪혀 큰 소리로 되돌아 왔다. 그럼에도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를 못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집중해서 읽고있었던 탓일 것이다. 사박사박. 작게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가볍고 조심스러웠다. 발소리만 울리는 그림자로 보이는 사람. 교내에 사람이 몇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며칠 동안 도서관엔 오는 사람이 거의 드물었기 때문에 누가 도서관에 왔을까 궁금해져 소리없이 일어나 슬그머니 발자국소리를 따라갔다. 무언가를 찾고있는 걸까. 그렇다면 조금 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에 슬금슬금 쫓아갔다. 그림자의 주인은 천천히. 그러나 좌우로 열심히 움직였다. 그림자에 발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때, 일단 책장 뒤로 숨어서 슬쩍 안쪽의 사람을 훔쳐보았다. 대여섯 권의 책을 들고 책장에 꽂고있는 키가 크고 마른 여학생. 모델처럼 늘씬한 몸매에 예쁜 얼굴. 우와. 절로 수줍어져 책장뒤로 도망가듯이 숨었다. 그녀는 책을 꽂고는 다른 책장으로 이동했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가 걸은 자리를 되밟아 꼬리잡기 하듯이 뒤따라 갔다. 마치 연예인을 훔쳐보는 파파라치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또 다른 책을 책장에 단정히 꽂아 놓고는 또다시 다른 책장으로 이동했다. 책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랬구나. 

슬쩍 뒤를 따라가다 그녀가 정리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음... 책은 분명 제자리에 순서도 위,아래도 확실하게 맞도록 꽂혀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 눈에 걸렸다. 무언가 거슬리는 점이 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손이 그녀가 정리한 책들을 다시 정리하고있었다. 조금씩 미묘하게 앞 뒤로 어긋나 삐쭉빼쭉한 모습이 거슬렸던 것이다. 책등이 완벽하게 일렬로 정렬되었다. 그제야 흐뭇하게 책장을 바라보고는, 이미 여학생이 정리하고 지나간 곳들을 되돌아 가며 다시 정리하였다. 그녀가 정리한 책들은 빈틈이 없어서 자신은 그저 줄을 새로 맞추는 일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줄맞추기는 다른 줄을 또 다른 줄을 정리하도록 만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책장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리하고있었다. 아. 이쪽 책장 저번에 한번 정리 했던 건데. 왜 또 하고있는거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만 둘까 싶었지만 이미 손을 댄 이상 성에 차지않으면 도저히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빨리하고 남은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 정리하고 있을 때 머리위로 그림자가 서렸다. 


"정리하는거니?"


목소리가 들려와서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이 났다. 자신이 도둑고양이처럼 자신의 뒤를 살금거리며 쫓아다닌 것을 알아챘을까. 찔리는 것이 있어 쭈볏거리며 뒤로 돌자 아까 훔쳐보던 여학생이 서있었다. 바라보는 얼굴은 온화했지만 뜨거운 햇볕을 피하듯 그 시선을 피해 책장의 그늘 속으로 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이상해보이겠지. 내색않고 천천히 슬쩍 올려다 보았다가 주르륵 흐르듯 떨어지며 그녀의 목언저리를 바라보았다. 목 언저리 양옆으로 만져보면 분명 실크처럼(보다도 훨씬)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 한점 없는 실내임에도 결 좋게 살랑거렸다. 보통 이럴때면 위아래로 훑어보거나 흘겨본다고 오해를 사서 종종 시비가 걸리는 일도 많았다. 그렇지만 좀처럼 고쳐지지않는 버릇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도서부?"
"네."
"나도 도서부야. 못보던 얼굴인데, 몇 학년?"
"1학년이요."
"그래서 그렇구나. 안녕. 난 신루아야. 2학년."
"안녕하세요. 청산..의..에요."
"청 산? 외자야?"


남자아이 같은 이름이 부끄러워 항상 이름을 말할 때면 안그래도 없던 자신감이 몹시 쪼그라 들어 말라비틀어지는 듯한 기분이 된다. 가뜩이나 작은 목소리가 뒤로 가며 더 흐려지자, 잘 안들렸나보다. 결국 예쁘지도 않은 이름을 두번 말해야했다. 


"아뇨, 청산의에요"
"아~ 산이. 산이 맞지?"
"네."
"이름 예쁘다."
"고맙습니다."


빈말일지도 모르지만 모델처럼 키도 크고 이름까지도 예쁜 선배의 칭찬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손가락 끝을 잡고 꼼지락거리며 살짝 고개숙여 인사했다. 비록 이름은 조금 틀렸지만 상관없었다. 제대로 알고있어도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그리고 자신도 그편이 조금이라도 여자아이 이름같아서 좋았다. 좀더 어릴적 친한 친구들이 몇 있었을 적엔 좀더 귀여운 별명같은 것도 만들어 주었었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모르는 얼굴이 가득한 곳.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의 생활은 자유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쓸쓸해졌다. 입학하고 1년이 다되어 가는데도 여즉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 얼굴도 못쳐다보고 바닥만 보고 다니면서 직설적으로 제 할말 다하는 아이는 넌씨눈(넌씨bal눈치도없냐)이겠지. 여자아이들 사이에선. 잠시 딴 생각으로 빠진 탓에 멀뚱멀뚱 서있게 된 선배는 상냥하게도 먼저 다시 말을 걸어주었다.


"아까 책을 보고 있길래,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방해됐니?"
"아니에요."
"정리 다한 것 같은데, 같이 앉아서 책 볼래?"
"네,네! 좋아요."


어떤 책을 읽고 있었냐고 물어봐 주는 선배의 말에 보고있던 영미권 장르소설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해주며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읽고있다 중간에 내버려진 펼쳐진 책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던 책상 위로 마주보는 자리에 두꺼운 책 하나가 더 놓이게 되었다. 조심스레 펼쳐진 두꺼운 책안의 내용들은 알파벳이 가득했다. 소설책이나 문헌집이라기보다 참고서인 듯 했다. 이제 보니 선배의 손에는 볼펜심을 꺼내지 않은 볼펜이 들려있었다. 모두가 함께보는 참고서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보려는 배려같았다. 들어간 볼펜심 처럼 어느새 선배의 다정함이 들어와있었다. 그 간질거리는 느낌이 좋아서 책을 세워 읽는척 입가를 가리고 혼자 몰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선배가 계속 내가 하고 있는 삔이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다음에 언젠가 선배에게 같은 삔을 선물해주면서 친하게 지내달라고 해봐야지. 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을 상상하면서 혼자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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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다가 대화도 나오고, 

삔을 매번 바꾸는 산의양을 기억하고 있어서 도대체 몇개나 되는 삔을 가지고 있는거냐고 묻는다던가..! 신루아[아윤]


 윤솔[온]

 홍서우[샘물]


 산의의 스타일링 기법이 궁금해지네요~!! 이해진[카즈]

   

은수가 산의양 화장한것보고 예쁘고 신기해서 흐에..

하고 보다가 자기발 걸려 넘어지는 걸 보고 어이없게 내려다봐줬으면 좋겠습니다. (?) 안은수[설레]










[청산의] 부끄러움 (w.안은수)




교내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아서 몇걸음 걷다보니 복도 맞은편에 누군가 걸어오고있었다. 모르는 남학생이었다. 방학동안 남아있는 학생들 중 한명이겠지. 방학 이후 처음 마주친 사람이었다. 그는 걷다가 갑자기 제자리에 섰다. 왠지 이쪽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제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저가 스쳐 지나가려는 타이밍에 그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부딪치고 말았다. 남학생은 저와 부딪히며 몇걸음 뒤로 뒷걸음질 치다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와중에도 그는 품에 든 가방이 무척이나 소중한듯 꼬옥 끌어안은 채였다. 부디친건 이쪽이었는데 넘어진 것은 저쪽이다. 보통은 여자아이쪽이 넘어지는게 아니었던걸까. 자신이 그렇게나 강력한 몸통박치기를 모르는 남학생에게 행하였다고 생각하니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건 마치 사람들 많은 도로 한복판에서 대자로 넘어진것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 넘어진건 저쪽 사람이었고 자신은 서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게다가 성별이 남자인 사람과는 살면서 말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공학이었지만 남학생들은 여학생들보다 더욱 대하기 어려웠고 짖궃은 장난에 괴롭힘만 당한 기억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고등학교도 기숙사제인 여고를 희망했지만 원하는 기준에 차는 곳이없었고, 가장 마음에 든 이곳은 공학이었지만 어차피 남녀 분리반이기 때문에 평소 생활에도 그리 많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 기숙사도 따로 쓰고. 그런데 이성과의 첫만남이 이렇게 창피스러운 일일줄이야.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싶은 생각뿐이었지만 우선 잘못한 쪽에서 먼저 사과부터 해야한다. 



"죄송합니다."

"아,아니야...내가 미안해. 내가 얼굴을 보ㄷ...아니, 멍하니 서있었는걸."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부딪쳤는걸요.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주의했어야했어요,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 응, 괜찮아!"



한사람은 앉아서 한사람은 서서 서로에게 사과를 하는 콩트같은 상황이 잠시 지나갔다. 자신이 아래쪽에 있는 남학생에게 사과하기 위해 낮은 곳까지 허리를 접어야 했기에, 넘어져있던 그는 그제야 아직도 자신이 넘어진채로 찬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벌떡일어났다. 일어나니 자신보다 머리하나 정도만큼 키가 큰 남학생을 무심코 올려다 보다가 동공이 보일만큼 밝은 갈색 눈동자 두개와 시선이 마주쳤다.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표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눈알만 굴려 시선을 피했다. 음. 눈이 마주쳤던걸 알았을까? 아니 그래도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거기다 유난히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있는것 같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흐르는 것같았다. 손 안쪽이 바짝 타들어 가는것 같아 괜스레 손가락 끝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신발 안에서 발가락도 꼼지락 거렸다. 그러면서 최대한 태연한척 하고있었다. 시선을 내린곳에 아까 남학생이 넘어지면서도 꼬옥 안고있던 가방이 보였다. 검은 네모모양의 그것은 악기가방 같아 보였다. 저정도 크기와 모양이면 악기가방일것같다. 그중에서도 들어갈만한 거라면 바이올린 같은걸까. 말 걸지 말고 그냥 인사만하고 뒤돌아 뛰어갈까도 생각했지만, 우선 그의 시선을 분산시켜야겠다고 생각해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열었다. 



"악기가방인가요?"

"응. 맞아. 바이올린."

"그렇군요."



역시나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니 남학생의 시선이 얼굴쪽에서 자연스럽게 가방쪽으로 옮겨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짤막한 대화 후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딱히 인간관계를 안하려는건 아니지만, 대화를 하는 것에 있어 서툰 점은 어쩔 수 없었다. 더더욱이 상대방이 모르는 남학생이라면. 어쩌지. 이제 가도되는 타이밍일까. 싶은 생각으로 언제 발을 움직이면 좋을지 제고 있을 찰나, 남학생이 다시 내 얼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걸어왔다. 



"어, 한번 볼래?"

"아니요."

"아 그래..."

"네."



단호하게 거절의 말을 하는 바람에 또 다시 대화가 끊겨 어색한 침묵으로 대치중이었다. 왜 자꾸 쳐다보는걸까. 혹시 얼굴에 뭐가 묻어있나. 아까 먹은 크림빵이 묻었나. 뭐가 붙었나. 머리카락을 먹었나. 설마 코털이 나왔나. 도대체 왜 저렇게 직선으로 바라보는 거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저렇게 올곧게 바라볼 수 있는걸까.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져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서있는 건지도 왜 이러고 있는건지도 모르겠을 즘에 남학생이 갑자기 손을 머리 쪽으로 뻗어오는 바람에 굉장히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왜 손을 뻗는거지! 온몸이 뻣뻣해질 만큼 긴장해버린 채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리고 굳어있는데, 금세 손을 내린 남학생의 입에서 포탄이 날아오는 듯한 발언이 얼굴로 날아왔다. 



"아, 미안! 놀랬어? 얼굴이...아니, 속눈썹이 너무 길어서 예뻐서... 아! 아니 신기해서보는데 머리에 삔이 떨ㅇ..."

"꺢!"

"어져????"



그는 삼키듯 단어를 급히 얼머부려 버렸지만 이미 확실하게 단어를 듣고 난 후였다. 남학생이 했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머리에 과부하가 왔는지, 이해하는 바람에 과부하가 왔는지 얼굴에 열이 몰려 뻥! 하고 터질것만 같았다. 예쁘다니! 분명히 예쁘다고 했어! 예쁘대! 뭐가 예쁘다는 거지! 당황스럽고 부끄러움에 어쩔줄을 몰르는 채로 괴상한 소리를 낸채 제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고 무작정 달려도망갔다. 뒤에서 남학생이 부르는것 같았지만 못 들은 척 하고 더 빨리 뛰어서 도망갔다. 너무 너무 창피했다. 자신이 화장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만 갔았다. 아침에 완벽하게 마음에 들때까지 좌우 길이 굵기 까지 완벽히 똑같이 맞춰 그리고 나온 얼굴이 어떻게 보였을지 너무나 창피했다. 마스카라가 뭉쳤거나 아이라인이 번졌으면 어떡하지. 화장이 떴으면 어떡하지. 그걸 봤으면 어떡하지. 두 번 다시 아까의 남학생하고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마 내 얼굴을 기억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어떡하지. 오늘의 일은 평생 밤마다 이부자리를 발로 뻥뻥 차 제낄 흑역사 였다. 



"ㅡ떨어졌는데, 삔... 어떡하지..."





★               ★              ★





한참을 도망쳐 기숙사로 돌아가 제 방에 숨고나서야 안심이 되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 진정된 후에야 일어나 떨리는 다리로 겨우 걸어 기숙사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는 두손으로 콩콩콩 애꿎은 베개만 때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평소의 맥박수를 찾은 후에야 일어나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정리하기위해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을 보니 바로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가지런히 정렬되어있던 분홍색 삔 하나가 없어졌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들 중 하나였는데. 도대체 어디서 잃어버린걸까.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어서 무언가를 분실하는 경험이 적기는 하지만, 개중에서도 유난히 똑딱이 삔은 이상하게 잘 없어지는 편이었다. 역시 그냥 실 삔이나 집게 삔을 살걸 그랬다. 오늘은 살면서 몇없는 일들을 한꺼번에 겪은 날이었다. 갑자기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옷이 구겨지는 것을 못참아해서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절대 옷을 입은 채 자거나 하지않았지만, 오늘은 당장 잠들고 싶었다. 그래서 빨리 오늘 있었던 일들을 잊고싶었다. 달콤한 꿈들이 시름을 잊게 해줄 것이다. 억지로 오지않는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고집스럽게 감고 숫자를 세었다. 1. 2. 3. 4. 5...  



숫자를 세고 있는데도 자꾸 남학생의 껑충 올라간 소매에 드러난 손목과 도드라진 손목뼈가 생각이 났다. 









은수군을 위한 피아노 연주를 배경음으로 귀엽게 깔아봤습니다! 바이올린은 아니지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헤헤(*,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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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청기간의 시점은 방학식이 끝나고 스쿨버스가 산 아래로 내려간 이후, 신청미션의 등산객 사체 발견 전까지인 닷새 동안의 시점입니다.





청산의


" 아니, 별로. 내 마음의 별로. "


여 | 17 | 160

도서부



외모

하얀 계란형 얼굴에 2:8가르마로 왼쪽에서부터 오른쪽 귀 뒤로 넘기는 짧은 단발. 귀밑 10cm 정도.  

항상 끝을 고데기로 안쪽으로 말아 깔끔하게 하고 다닌다. 항상 귀 뒤로 넘긴 오른쪽으로 삔을 꽂는다.

꾸미는 것을 좋아해 평소에도 화장을 하고 있지만 옅어서 크게 티 나지는 않는다. 

현재는 방학이라 조금 더 진하게 하고 있어 마스카라와 붉은색 틴트가 한눈에 보인다. 

베이지색 카디건에 카라에 꽃무늬가 수놓아진 흰색 셔츠, 검은색 후레아모양의 치마 레깅스를 입고 베이지색 캔버스화를 신고있다. 


성격


내성적이며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한다. 말을 할때도 항상 작게 말한다.

얌전하게 말하면서 자기 할 말은 다 한다. 의사 표현은 확실하게 전달한다. 호불호가 정확하다.

언제나 느긋하게 행동한다. 자신은 나름대로 편하게 하고 있는 건데 남들이 보기에는 굼떠 보인다. 

강박증세가 있어 색깔별로 분류한다던가, 줄맞춰 놓는다던가 하는 것에 집착한다.

무언가 흐트러져 있는 것을 제일 못 견뎌 한다. 

마음에 차도록 정리하고서야 다른 일을 한다. 완벽주의끼가 있어 더 하다.

유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행동력이 있어 때론 과감하다. 


기타


- 이름이 남자아이 같아서 싫어한다.

- 아기자기한 소품, 팬시 등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 삔을 유독 좋아해 모으는 수집벽이 있다. 

- 기분에 따라 매일 삔이 바뀐다.

- 취미로 인터넷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제법 오래되어 인지도가 있는 편인 듯.

- 바로 윗줄을 비밀로 하고 있다.



오너

푸름 








아빠 새엄마 양오빠 오빠


엄마가 죽고 재혼.

새엄마가 아들이 있었음. 같이 살게 됌.

아빠는 알콜중독으로 술먹으면 폭력적이 되어서 다때려부시고 때림.

술깨면 미안하다고 정말 실수라고 엄청 잘해주면서 사과함.

근데 그게 반복되니 걍 시발

친오빠도 아빠 닮아서 폭력적임. 근데 평소에는 착한 척함.

양오빠가 형이 되면서 더욱 심해짐. 양오빠가 성격이 지랄맞게 못되처먹어서

괴롭히니까 그걸 동생한테 품. 

아빠→새엄마→양오빠→오빠→본인

이라는 악순환.

그와중에 새엄마가 본인을 미워해서 괴롭힘. 아들은 아빠눈치 보여서 못괴롭힘.

그나마도 증거없이 티안나게 괴롭힘. 아무도없을때 물고문이나 음식에 이상한거 타주거나.


무조건 기숙사 있는 학교로 와서 숨어 지내다 졸업하면 바로 도망가서 독립해서 살 생각 중.








이번이 처음은 아니야
어떻게든 얘기를 들었을 수도, 모를 수도 있겠지
이미 들어본 적 있는 너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 이 얘기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너라면, 너는 또 어떨까
우리는 잘못한 게 없어

왜냐고?

그는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두려워 했고
그는 살아 숨쉬는 우리를 비웃었고
그는 우리들을 잃어버리고서도 자신의 슬픔만을 생각했으며
또 그는 슬퍼할 우리를 외면했어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을 씹어 삼켜 버리고
우매하게도 그는 깨달아야 할 것을 몰랐지
더럽게도 그는 우리를 몰아넣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더니
결국엔 우리를 죽였어

이래도 우리가 잘못했어?








[청산의] 살어리 살어리 랏다.




도시와 떨어져 고립된 학교. 기숙사제. 소설이나 만화에 많이 등장하는 요소이지 않을까.

무언가 평범함과는 다른 것이 있지는 않을까, 쳇바퀴 마냥 돌고 도는 일상에 색다른 설렘을 주지않을까 하는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입학했던 것이 엇그제 같은데. 벌써 겨울 방학이다. 상상과는 다르게 막상 들어온 학교는 평범하디 평범한 학교로 똑같이 공부 잠 공부 잠 뿐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기숙사 생활은 굉장히 흡족스러웠다. 첫째, 방과 후에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둘째, 방학 중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셋째, 졸업 할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는 점. 다른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로써는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이미 여름방학을 한번 지내보고 난 뒤라 두번째 맞이하는 방학에 살짝 들떠있기 까지 했다. 겨울방학은 여름방학 보다 훨씬 기니까. 겨울 밤은 여름의 밤 보다 훨씬 기니까.


운동장에 남은 바퀴자국을 내려다 보고있다가 이내 창에서 고개를 돌렸다. 차들이 떠난 자리에는 어린아이가 스케치북에 장난스럽게 그려논 낙서같은 그림자국만 남았다. 낙서를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들어있는 쪽지가 생각났다. 부스럭. 손을 넣어 만져보니 분명히 들어있다. 쪽지를 발견한건 정말 우연이었다. 누군가 흘린 듯이 도서실 책상위에 떨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보느라 펼쳐둔 책 위에. 아주 잠깐 몇초 졸았을 뿐인데 눈 떠 보니 책위에 쪽지가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것이 누군가 나에게 보내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쪽지를 챙겨온건 순전히 변덕이었다. 비뚤어짐 없이 반듯하게 두번으로 접힌 쪽지. 그안에 적힌 내용이 흥미로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두려워 했고

그는 살아 숨쉬는 우리를 비웃었고
그는 우리들을 잃어버리고서도 자신의 슬픔만을 생각했으며
또 그는 슬퍼할 우리를 외면했어」



맞아. 그는 우리를 외면했어. 나는 무슨 뜻으로 적힌 글귀인지도 모르면서 멋대로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서 생각했다. 마치 누군가 내 얘기를 써논 듯 했다. 두리뭉실하게 돌려말해 간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사실 무엇을 대입하든 얼추 끼워맞추기가 가능한 글이었다. 그러니 딱히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읽는 내가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지. 또 그것과 별개로 쪽지가 어떻게 책 위에 놓아져 있었을까 생각하면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버스가 떠난 이후에 도서관에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내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남아있는 학생들중 누군가가 장난친 것 이라고 생각했다.  



「더럽게도 그는 우리를 몰아넣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더니
결국엔 우리를 죽였어」



모두 떠나고 인적이 드믄 학교. 아무도 없는 도서관. 혼자 졸고있는 학생. 누가 봐도 장난치고 싶어지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써놓았다고 겁에 질려 벌벌떨면서 두리번 거리거나 울면서 기숙사로 뛰쳐가는 일은 없다. 딱히 귀신이나 요괴같은 것을 믿지는 않으니까. 귀신 얘기는 그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지 무서워 하는 편이 아니었다. 쪽지를 발견한 후 읽고난 뒤 덤덤하게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읽던 책은 제자리에 꽂아 정리하고 기숙사로 돌아갔을뿐이었다. 숨어서 지켜보고있던 사람이 있었다면 싱거운 반응에 실망하며 돌아갔겠지. 부스럭. 주머니 속에서 의미없이 쪽지를 만지작 거리면서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결국엔 우리를 죽였어」



그 구절이 계속 해서 어딘가에 남아 맴돌고 있었다. 





◈         ◈         ◈





도서관에 갔다가 문이 잠겨있어서 남아계실 선생님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묘한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방학하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놓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까봐 눈깜짝할 사이에 다들 하산하고 교내에 남아있는 것은 몇 사람 없을 것인데. 평소와 같은 소란이라고 하기에는 수근거림 사이에 뭔가 이질감이 서려있었다. 평소처럼 무시할 법했으나 그것이 궁금함을 자극했다. 무슨 얘기냐고 말을 거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그저 지나치는 척 얘기를 엿듣기위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다가가보았지만, 어느 새 수근거림도 인기척도 사라지고 없었다. 별일 아니었겠지. 또다시 혼자가 되어 괜시리 발을 구르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작게 발길질을 하였다. 분명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방학 이후 여즉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계속 방안에만 있었던 제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혼자여도 외로움을 타거나 무섭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때 눈 쌓인 운동장이 보였다. 


왜 그랬을까. 아무도 없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운동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옷깃 사이로 칼날처럼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기위해 카디건을 여미고 양손으로 팔짱끼듯 양팔을 감싸안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좋았다. 누구의 발자국일까. 누군가가 걸어갔다가 뛰어서 되돌아 온 듯한 발자국을 보았다. 걸어가다가 왜 뛰어서 돌아갔을까. 추워서일까. 그 발자국이 가는 방향으로 발자취를 훑듯이 나아가자 하나, 둘, 늘어나는 발자국이 무수히 많아졌다. 마치 누군가 여럿이 다녀간것도 같았고, 누군가 혼자서 이리저리 사방을 헤매고 다닌것도 같아 보였다. 그리고 무수한 발자국들의 한가운데에는 봉긋 하게 솟아오른 하얀 무덤이보였다. 왜 눈이 저기에만 쌓여있을까. 눈사람을 만들려고 했던 걸까. 눈을 치우려고 했던걸까. 조금 더 선명히 보일 정도로 다가서자 새하얀 눈 사이로 이물감을 주는 것이 묻혀있었다.


파랗고 검게 꽁꽁 얼어붙은 손. 그래. 저건 손이었다. 그것도 사람의 손. 


왜 나는 쌓여있는 눈들을 보고 무덤이라고 생각했을까.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 당혹스럽게 눈앞에 다가왔다. 

설마 진짜 죽은걸까. 지금이라도 119에 신고하면. 그냥 쓰러져 있는 것뿐일지도 모르고. 설마 죽었겠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는 달리 선뜻 만져서 확인해 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왠지 그냥 만지끼 껴려 졌다. 별것아니지만 꺼림직함에 본능이 먼저 반응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한눈에 보아도 온기라곤 일말의 여지도 없어보이는 시퍼렇게 얼어붙은 사람의 손이란 누가봐도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 한번 만져보고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런데 만지기 싫었다. 이상한 감정이다. 결국 나는 두 내적갈등의 충돌에 의해 앞으로 손을 뻣어 검지손가락 만으로 꽁꽁얼어붙은 손을 쿡 찔러보았다. 마치 냉동실에 얼어있는 동태같은 감촉이었다. 딱딱한 나무토막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정확히 비유를 들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굉장히 충격적으로 불쾌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그렇다는건 역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람은 진짜 죽어있는... 



「결국엔 우리를 죽였어」



눈 앞에 죽어있는 사람. 의문의 쪽지. 고립된 학교. 끊어진 연락수단. 갇혀있는 사람들. 

이건 떡밥이다. 추리소설이 시작하기 직전에 뿌리고 시작하는. 나는 누군가의 게임에 참가한걸까. 아니, 스스로 굴러 들어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 누군가가 원치 않는 개입이라면 나는 눈 앞의 사람처럼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그저 등산하러 왔다가 지병이 있어 쓰러져 왕래하는 사람이 드믄 탓에 추위에 동사한 것 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나는 지금 과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야만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테니까. 나는 추운것도 잊은 채, 여전히 하얀 무덤을 보고 서서 그것이 현실임을 인지할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꿈이던 현실이던 무언가 꺼림직한 느낌이 가슴 한켠을 싸하게 두들기고 지나갔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나비가 되어, 차갑게 시린 하얀 도화지 위에 서서 하염없이 눈앞의 하얀 무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저 하염없이.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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