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공부는 대체 언제 하냐?”
같이 방을 쓰던 녀석은 하루의 반을 잠으로 때우는 듯한 이레를 보면서 그렇게 물었더랬다. 그에 이레는 말도 안 되는 걸 묻는다는 것마냥 대꾸했었다.
“공부? 그거 언제나 열심히 하잖아.” “음악 외엔 바닥을 치면서 말은 잘한다? 맨날 잠만보처럼 잠이나 퍼 자면서.”
그는 매번 시험 기간만 되면 제 옆에 달라붙어서 공부를 도와주는 이였다. 사실 도찐개찐이면서 그래도 이레보다는 그나마 성적이 높다고 마치 어미 새마냥 이것저것 챙겨주며 가르치려 들었다. 그럴 때면 이레는 늘 과장된 제스처로 놀란 척을 하면서 검지를 세워 까닥까닥 흔들었다. 물론 고맙기야 했지만.
“바닥이라니 그렇게 섭섭한 말을, 나름 종합적으로는 평균 안에 드는 몸이야. 난 평범한 게 좋아, 평범한 게. 무난하게 학교 다니다가 그럭저럭 졸업해서 어영부영 회사 들어가고 어쩌다가 여자 하나 만나서 원활한 가정을 꾸리고 그렇게 평안하게 오순도순 살다가 죽는 거지.”
이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꿈은 그랬다. 책에서나 나올 법한 일상적인 가정, 크게 모난 데도 없고 어그러진 데도 없는, 그저 둥글둥글하기만 한 삶이다. 그런 꿈에는 특출 난 무엇도, 독특한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쉬웠지만 또 어떻게 보면 가장 어려운 꿈이기도 했다. 철푸덕 하니 책상 위로 엎어져서 나무늘보처럼 길게 늘어지는 이레를 보고 그는 고개를 설레 저었다.
“어이구, 그러세요? 장하네요, 우리 이레씨. 인생이 그렇게 뜻대로 되겠냐.” “안 되면 되게 하라. 누가 그랬잖아. 거 누구야.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좋아하네. 네 자신이나 좀 알아라.” “난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엣헴.” “퍽이나.”
. . .
이레는 잠에 취한 눈을 끔벅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지 싶었다가 주위를 둘러보고서 양호실인 걸 알았다. 그러니까 손을 베여서 데일 밴드를 찾으러 왔다가 흰 침대가 유난히 눈에 띄어서 저도 모르게 누웠는데 그대로 자버린 모양이었다. 양호 선생조차 없어 텅 빈 양호실에서 눈만 꿈벅꿈벅 감았다 뜬다. 몽롱하게 흐려진 초점은 반쯤 잠에 빠져 있다는 걸 증명하듯 또렷하지 못했다. 이레는 한 박자 늦게 방금 전의 대화가 꿈이었다는 걸 인지했다. 매번 같은 대화로 투닥거리던 그 때가 왜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생각이 났다기보다는 왜 그때의 일을 꿈으로 꾼 건지 모르겠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고민에 빠져 있다가 한참 뒤에야 결론을 도출해냈다. 저는 이렇게 학교에 갇혀 있는데 홀랑 버스 타고 집으로 가버린 친구 놈이 괘씸했던 탓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면 그저 놀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맨날 투닥거려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레는 양호실 침대 아래로 훌쩍 내려섰다. 엉망이 된 침대를 잠시 보다가 슬그머니 대충 잡아 당겨서 시트를 정리한다. 옆에 놓아 두었던 데일 밴드-붙여야 한다는 건 이미 잊었다-를 챙기고서 양호실에서 나가기 위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독 컸다. 추운 복도를 거닐면서도 잠에 취한 정신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야 하는데 왜 벌써 일어났냐고 어필하는 것마냥 어디든 누워서 자라고 성화를 부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게 자다 딱 동사하기 십상이니 어떻게든 기숙사까지는 가야 한다. 이레는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졸리다, 졸려. 하트 여왕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가서 자야지. 비몽사몽 한 상태로 어딘가에서 봤었던 대사를 속으로 읊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았다.
빠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발에 무언가가 밟히는 느낌이 난 건 그 때였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무심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들었는데 또 바로 지척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갈색의 짧은 단발 머리를 한 그녀는 상체를 반쯤 굽히고서 어정쩡하게 손을 뻗고 있었다. 가늘게 뻗은 손가락을 보고 오, 예쁜 손이네. 하고 무심결에 생각했다가 고개를 들어서 머리에 꼽힌 분홍색 머리핀을 보았다. 그리고 화장을 했지만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도 보았다. 카라에 꽃무늬가 수놓아진 흰색 셔츠부터 시작해 베이지색 가디건과 검은색 플레어 스커트에 레깅스까지 시선을 내렸다. 종국에는 그녀가 신은 베이지색 캔버스 화를 지나서 그녀의 시선이 닿아있는 제 신발까지 도달했다.
“……어?”
이레는 내디뎠던 한 발을 조용히 그대로 들었다. 작은 조각이 신발 밑창에 붙어 있다가 툭 하고 떨어졌다. 발에 밟혀 재주 좋게도 박살 난 틴트가 그 자리에 있었다. 발간 틴트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누가 봐도 그녀는 떨어트린 틴트가 굴러감에 그것을 주우려 쫓아오던 차였고, 그것을 지나가다가 밟아버린 것은 이레였다. 깨닫는다 해서 부서진 틴트가 제 모습으로 돌아올 리는 없었지만. 이걸 어쩌나 싶어 멍을 때리고 있는 그녀의 앞에서 이레는 뺨을 검지로 긁적이며 발을 치웠다.
“미안해? 음, 미안해.”
그래도 일단은 제 잘못이겠거니 해서 사과를 건넸다.
“아뇨, 괜찮아요.”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굽혔던 몸을 바로 세웠다. 연한 갈색이다. 제게 들린 그녀의 목소리는 마른 가을의 낙엽처럼 그러한 색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어쩐지 슬그머니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이레를 쳐다 보고 답했다. 그래서 빤히 보고 있노라면 그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지 티는 안 내려고 애를 쓰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마주 엮였던 시선은 곧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서 제 눈을 피했다. 이레는 그런 그녀를 계속 쳐다보다가 한번 더 입을 열었다.
“그러게 왜 흘리고 다녀. 아니면 내게 주의를 주던가 했어야지.” “……제가 부주의했기 때문이니까요.” “어쨌든 밟은 건 내 쪽인데.” “제 실수였어요.”
부러 그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말해본 것뿐이었는데 그녀는 즉각 도리질쳤다.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마냥 애써 끝맺음을 한다. 문득 자신이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타입인가 싶었으나 아마 그녀의 성정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까지는 그냥 지나가도 되는 문제였으니 자신이 신경 써줄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 “아, 잠깐만.”
이레가 더 이상 말이 없자 그녀는 무례해 보이지 않도록 적당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니, 건네려 했으나 이레는 그녀의 말을 자르면서 제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손에 잡히는 것을 무작정 꺼내자 휴대폰과 머리핀 몇 개, 그리고 데일밴드가 잡혔다. 이번에는 다른 쪽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왜 있는지 모를 펜과 립밤이 있었다. 이레는 립밤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넣고서 립밤은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새 거니까 줄게. 한번도 안 썼어.” “괘, 괜찮아요. 정말.”
그녀는 갈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이레는 생각을 바꿀 마음이 아예 없는 모양이었다.
“응, 나도 괜찮아. 그러니까 여기.”
그렇게 기어이 그녀의 손에 립밤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곤란한 듯 어색한 듯 손바닥에 옮겨진 립밤을 쥐었고, 이레는 그제서야 만족한다는 듯이 신발 바닥에 묻은 틴트를 닦듯 바닥에 발을 몇 번 문지르고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어느새 잠이 깨버렸다는 사실을 느낀 건 그 다음이었다.
[청산의] 살어리 살어리 랏다. 2015.09.14 / WRITTEN BY. 청산의[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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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떨어져 고립된 학교. 기숙사제. 소설이나 만화에 많이 등장하는 요소이지 않을까. 무언가 평범함과는 다른 것이 있지는 않을까, 쳇바퀴 마냥 돌고 도는 일상에 색다른 설렘을 주지않을까 하는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입학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겨울 방학이다. 상상과는 다르게 막상 들어온 학교는 평범하디 평범한 학교로 똑같이 공부 잠 공부 잠 뿐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기숙사 생활은 굉장히 흡족스러웠다. 첫째, 방과 후에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둘째, 방학 중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셋째, 졸업 할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는 점. 다른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이미 여름방학을 한번 지내보고 난 뒤라 두번째 맞이하는 방학에 살짝 들떠있기까지 했다. 겨울방학은 여름방학 보다 훨씬 기니까. 겨울 밤은 여름의 밤 보다 훨씬 기니까.
운동장에 남은 바큇자국을 내려다 보고있다가 이내 창에서 고개를 돌렸다. 차들이 떠난 자리에는 어린아이가 스케치북에 장난스럽게 그려놓은 낙서같은 그림자국만 남았다. 낙서를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들어있는 쪽지가 생각났다. 부스럭. 손을 넣어 만져보니 분명히 들어있다. 쪽지를 발견한건 정말 우연이었다. 누군가 흘린 듯이 도서실 책상 위에 떨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보느라 펼쳐둔 책 위에. 아주 잠깐 몇초 졸았을 뿐인데 눈 떠 보니 책위에 쪽지가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것이 누군가 나에게 보내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쪽지를 챙겨온건 순전히 변덕이었다. 비뚤어짐 없이 반듯하게 두번으로 접힌 쪽지. 그안에 적힌 내용이 흥미로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두려워 했고 그는 살아 숨쉬는 우리를 비웃었고 그는 우리들을 잃어버리고서도 자신의 슬픔만을 생각했으며 또 그는 슬퍼할 우리를 외면했어」
맞아. 그는 우리를 외면했어. 나는 무슨 뜻으로 적힌 글귀인지도 모르면서 멋대로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서 생각했다. 마치 누군가 내 얘기를 써놓은 듯 했다. 두리뭉실하게 돌려말해 간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사실 무엇을 대입하든 얼추 끼워맞추기가 가능한 글이었다. 그러니 딱히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읽는 내가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지. 또 그것과 별개로 쪽지가 어떻게 책 위에 놓아져 있었을까 생각하면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버스가 떠난 이후에 도서관에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내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남아있는 학생들중 누군가가 장난친 것 이라고 생각했다.
「더럽게도 그는 우리를 몰아넣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더니 결국엔 우리를 죽였어」
모두 떠나고 인적이 드문 학교. 아무도 없는 도서관. 혼자 졸고있는 학생. 누가 봐도 장난치고 싶어지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써놓았다고 겁에 질려 벌벌떨면서 두리번 거리거나 울면서 기숙사로 뛰쳐가는 일은 없다. 딱히 귀신이나 요괴같은 것을 믿지는 않으니까. 귀신 얘기는 그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지 무서워 하는 편이 아니었다. 쪽지를 발견한 후 읽고난 뒤 덤덤하게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읽던 책은 제자리에 꽂아 정리하고 기숙사로 돌아갔을뿐이었다. 숨어서 지켜보고있던 사람이 있었다면 싱거운 반응에 실망하며 돌아갔겠지. 부스럭. 주머니 속에서 의미없이 쪽지를 만지작 거리면서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결국엔 우리를 죽였어」
그 구절이 계속해서 어딘가에 남아 맴돌고 있었다.
◈ ◈ ◈
도서관에 갔다가 문이 잠겨있어서 남아계실 선생님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묘한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방학하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놓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까봐 눈깜짝할 사이에 다들 하산하고 교내에 남아있는 것은 몇 사람 없을 것인데. 평소와 같은 소란이라고 하기에는 수군거림 사이에 뭔가 이질감이 서려있었다. 평소처럼 무시할 법했으나 그것이 궁금함을 자극했다. 무슨 얘기냐고 말을 거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그저 지나치는 척 얘기를 엿듣기위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다가가보았지만, 어느 새 수군거림도 인기척도 사라지고 없었다. 별일 아니었겠지. 또다시 혼자가 되어 괜시리 발을 구르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작게 발길질을 하였다. 분명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방학 이후 여즉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계속 방안에만 있었던 제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혼자여도 외로움을 타거나 무섭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쌓인 운동장이 보였다.
왜 그랬을까. 아무도 없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운동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옷깃 사이로 칼날처럼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기위해 카디건을 여미고 양손으로 팔짱끼듯 양팔을 감싸안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좋았다. 누구의 발자국일까. 누군가가 걸어갔다가 뛰어서 되돌아 온 듯한 발자국을 보았다. 걸어가다가 왜 뛰어서 돌아갔을까. 추워서일까. 그 발자국이 가는 방향으로 발자취를 훑듯이 나아가자 하나, 둘, 늘어나는 발자국이 무수히 많아졌다. 마치 누군가 여럿이 다녀간것도 같았고, 누군가 혼자서 이리저리 사방을 헤매고 다닌것도 같아 보였다. 그리고 무수한 발자국들의 한가운데에는 봉긋 하게 솟아오른 하얀 무덤이보였다. 왜 눈이 저기에만 쌓여있을까. 눈사람을 만들려고 했던 걸까. 눈을 치우려고 했던걸까. 조금 더 선명히 보일 정도로 다가서자 새하얀 눈 사이로 이물감을 주는 것이 묻혀있었다.
파랗고 검게 꽁꽁 얼어붙은 손. 그래. 저건 손이었다. 그것도 사람의 손.
왜 나는 쌓여있는 눈들을 보고 무덤이라고 생각했을까.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 당혹스럽게 눈앞에 다가왔다. 설마 진짜 죽은걸까. 지금이라도 119에 신고하면. 그냥 쓰러져 있는 것뿐일지도 모르고. 설마 죽었겠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는 달리 선뜻 만져서 확인해 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왠지 그냥 만지끼 껴려 졌다. 별것아니지만 꺼림칙함에 본능이 먼저 반응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한눈에 보아도 온기라곤 일말의 여지도 없어보이는 시퍼렇게 얼어붙은 사람의 손이란 누가봐도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 한번 만져보고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런데 만지기 싫었다. 이상한 감정이다. 결국 나는 두 내적갈등의 충돌에 의해 앞으로 손을 뻗어 검지만으로 꽁꽁얼어붙은 손을 쿡 찔러보았다. 마치 냉동실에 얼어있는 동태같은 감촉이었다. 딱딱한 나무토막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정확히 비유를 들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굉장히 충격적으로 불쾌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그렇다는건 역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람은 진짜 죽어있는...
「결국엔 우리를 죽였어」
눈앞에 죽어있는 사람. 의문의 쪽지. 고립된 학교. 끊어진 연락수단. 갇혀있는 사람들. 이건 떡밥이다. 추리소설이 시작하기 직전에 뿌리고 시작하는. 나는 누군가의 게임에 참가한걸까. 아니, 스스로 굴러 들어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 누군가가 원치 않는 개입이라면 나는 눈 앞의 사람처럼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그저 등산하러 왔다가 지병이 있어 쓰러져 왕래하는 사람이 드문 탓에 추위에 동사한 것 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나는 지금 과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야만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테니까. 나는 추운것도 잊은 채, 여전히 하얀 무덤을 보고 서서 그것이 현실임을 인지할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꿈이던 현실이던 무언가 꺼림직한 느낌이 가슴 한켠을 싸하게 두들기고 지나갔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나비가 되어, 차갑게 시린 하얀 도화지 위에 서서 하염없이 눈앞의 하얀 무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저 하염없이.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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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의] 부끄러움 (w.안은수) 2015.09.15 / WRITTEN BY. 청산의[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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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아서 몇걸음 걷다보니 복도 맞은편에 누군가 걸어오고있었다. 모르는 남학생이었다. 방학동안 남아있는 학생들 중 한명이겠지. 방학 이후 처음 마주친 사람이었다. 그는 걷다가 갑자기 제자리에 섰다. 왠지 이쪽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제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저가 스쳐 지나가려는 타이밍에 그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부딪치고 말았다. 남학생은 저와 부딪히며 몇걸음 뒤로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와중에도 그는 품에 든 가방이 무척이나 소중한듯 꼬옥 끌어안은 채였다. 부디친건 이쪽이었는데 넘어진 것은 저쪽이다. 보통은 여자아이쪽이 넘어지는게 아니었던걸까. 자신이 그렇게나 강력한 몸통박치기를 모르는 남학생에게 행하였다고 생각하니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건 마치 사람들 많은 도로 한복판에서 대자로 넘어진것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 넘어진건 저쪽 사람이었고 자신은 서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게다가 성별이 남자인 사람과는 살면서 말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공학이었지만 남학생들은 여학생들보다 더욱 대하기 어려웠고 짖궃은 장난에 괴롭힘만 당한 기억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고등학교도 기숙사제인 여고를 희망했지만 원하는 기준에 차는 곳이없었고, 가장 마음에 든 이곳은 공학에 남녀 합반이었지만, 평소 생활에서 그리 많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 기숙사도 따로 쓰고. 그런데 이성과의 첫만남이 이렇게 창피스러운 일일줄이야.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싶은 생각뿐이었지만 우선 잘못한 쪽에서 먼저 사과부터 해야한다.
"죄송합니다." "아,아니야...내가 미안해. 내가 얼굴을 보ㄷ...아니, 멍하니 서있었는걸."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부딪쳤는걸요.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주의했어야했어요,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 응, 괜찮아!"
한사람은 앉아서 한사람은 서서 서로에게 사과를 하는 콩트같은 상황이 잠시 지나갔다. 자신이 아래쪽에 있는 남학생에게 사과하기 위해 낮은 곳까지 허리를 접어야 했기에, 넘어져있던 그는 그제야 아직도 자신이 넘어진채로 찬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벌떡일어났다. 일어나니 자신보다 머리하나 정도만큼 키가 큰 남학생을 무심코 올려다 보다가 동공이 보일만큼 밝은 갈색 눈동자 두개와 시선이 마주쳤다.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표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눈알만 굴려 시선을 피했다. 음. 눈이 마주쳤던걸 알았을까? 아니 그래도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거기다 유난히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있는것 같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흐르는 것같았다. 손 안쪽이 바짝 타들어 가는것 같아 괜스레 손가락 끝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신발 안에서 발가락도 꼼지락 거렸다. 그러면서 최대한 태연한척 하고있었다. 시선을 내린곳에 아까 남학생이 넘어지면서도 꼬옥 안고있던 가방이 보였다. 검은 네모모양의 그것은 악기가방 같아 보였다. 저정도 크기와 모양이면 악기가방일것같다. 그중에서도 들어갈만한 거라면 바이올린 같은걸까. 말 걸지 말고 그냥 인사만하고 뒤돌아 뛰어갈까도 생각했지만, 우선 그의 시선을 분산시켜야겠다고 생각해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열었다.
"악기가방인가요?" "응. 맞아. 바이올린." "그렇군요."
역시나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니 남학생의 시선이 얼굴쪽에서 자연스럽게 가방쪽으로 옮겨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짤막한 대화 후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딱히 인간관계를 안하려는건 아니지만, 대화를 하는 것에 있어 서툰 점은 어쩔 수 없었다. 더더욱이 상대방이 모르는 남학생이라면. 어쩌지. 이제 가도되는 타이밍일까. 싶은 생각으로 언제 발을 움직이면 좋을지 제고 있을 찰나, 남학생이 다시 내 얼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걸어왔다.
"어, 한번 볼래?" "아니요." "아 그래..." "네."
단호하게 거절의 말을 하는 바람에 또 다시 대화가 끊겨 어색한 침묵으로 대치중이었다. 왜 자꾸 쳐다보는걸까. 혹시 얼굴에 뭐가 묻어있나. 아까 먹은 크림빵이 묻었나. 뭐가 붙었나. 머리카락을 먹었나. 설마 코털이 나왔나. 도대체 왜 저렇게 직선으로 바라보는 거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저렇게 올곧게 바라볼 수 있는걸까.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져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서있는 건지도 왜 이러고 있는건지도 모르겠을 즘에 남학생이 갑자기 손을 머리 쪽으로 뻗어오는 바람에 굉장히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왜 손을 뻗는거지! 온몸이 뻣뻣해질 만큼 긴장해버린 채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리고 굳어있는데, 금세 손을 내린 남학생의 입에서 포탄이 날아오는 듯한 발언이 얼굴로 날아왔다.
"아, 미안! 놀랬어? 얼굴이...아니, 속눈썹이 너무 길어서 예뻐서... 아! 아니 신기해서보는데 머리에 삔이 떨ㅇ..." "꺢!" "어져????"
그는 삼키듯 단어를 급히 얼머부려 버렸지만 이미 확실하게 단어를 듣고 난 후였다. 남학생이 했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머리에 과부하가 왔는지, 이해하는 바람에 과부하가 왔는지 얼굴에 열이 몰려 뻥! 하고 터질것만 같았다. 예쁘다니! 분명히 예쁘다고 했어! 예쁘대! 뭐가 예쁘다는 거지! 당황스럽고 부끄러움에 어쩔줄을 몰르는 채로 괴상한 소리를 낸채 제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고 무작정 달려도망갔다. 뒤에서 남학생이 부르는것 같았지만 못 들은 척 하고 더 빨리 뛰어서 도망갔다. 너무 너무 창피했다. 자신이 화장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만 같았다. 아침에 완벽하게 마음에 들때까지 좌우 길이 굵기 까지 완벽히 똑같이 맞춰 그리고 나온 얼굴이 어떻게 보였을지 너무나 창피했다. 마스카라가 뭉쳤거나 아이라인이 번졌으면 어떡하지. 화장이 떴으면 어떡하지. 그걸 봤으면 어떡하지. 두 번 다시 아까의 남학생하고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마 내 얼굴을 기억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어떡하지. 오늘의 일은 평생 밤마다 이부자리를 발로 뻥뻥 차 제낄 흑역사 였다.
"ㅡ떨어졌는데, 삔...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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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도망쳐 기숙사로 돌아가 제 방에 숨고나서야 안심이 되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 진정된 후에야 일어나 떨리는 다리로 겨우 걸어 기숙사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는 두손으로 콩콩콩 애꿎은 베개만 때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평소의 맥박수를 찾은 후에야 일어나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정리하기위해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을 보니 바로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가지런히 정렬되어있던 분홍색 삔 하나가 없어졌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들 중 하나였는데. 도대체 어디서 잃어버린걸까.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어서 무언가를 분실하는 경험이 적기는 하지만, 개중에서도 유난히 똑딱이 삔은 이상하게 잘 없어지는 편이었다. 역시 그냥 실 삔이나 집게 삔을 살걸 그랬다. 오늘은 살면서 몇없는 일들을 한꺼번에 겪은 날이었다. 갑자기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옷이 구겨지는 것을 못참아해서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절대 옷을 입은 채 자거나 하지않았지만, 오늘은 당장 잠들고 싶었다. 그래서 빨리 오늘 있었던 일들을 잊고싶었다. 달콤한 꿈들이 시름을 잊게 해줄 것이다. 억지로 오지않는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고집스럽게 감고 숫자를 세었다. 1. 2. 3. 4. 5...
숫자를 세고 있는데도 자꾸 남학생의 껑충 올라간 소매에 드러난 손목과 도드라진 손목뼈가 생각이 났다.
[청산의] 훔쳐보기 (w.신루아) 2015.09.17 / WRITTEN BY. 청산의[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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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사박사박. 탁. 사박사박. 작지만 분명한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퍼졌다.
책을 읽는 것에 열중한 나머지 누군가 도서관 내에 들어온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넓은 공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책장에 소리가 부딪혀 큰 소리로 되돌아 왔다. 그럼에도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를 못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집중해서 읽고있었던 탓일 것이다. 사박사박. 작게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가볍고 조심스러웠다. 발소리만 울리는 그림자로 보이는 사람. 교내에 사람이 몇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며칠 동안 도서관엔 오는 사람이 거의 드물었기 때문에 누가 도서관에 왔을까 궁금해져 소리없이 일어나 슬그머니 발자국소리를 따라갔다. 무언가를 찾고있는 걸까. 그렇다면 조금 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에 슬금슬금 쫓아갔다. 그림자의 주인은 천천히. 그러나 좌우로 열심히 움직였다. 그림자에 발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때, 일단 책장 뒤로 숨어서 슬쩍 안쪽의 사람을 훔쳐보았다. 대여섯 권의 책을 들고 책장에 꽂고있는 키가 크고 마른 여학생. 모델처럼 늘씬한 몸매에 예쁜 얼굴. 우와. 절로 수줍어져 책장뒤로 도망가듯이 숨었다. 그녀는 책을 꽂고는 다른 책장으로 이동했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가 걸은 자리를 되밟아 꼬리잡기 하듯이 뒤따라 갔다. 마치 연예인을 훔쳐보는 파파라치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또 다른 책을 책장에 단정히 꽂아 놓고는 또다시 다른 책장으로 이동했다. 책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랬구나.
슬쩍 뒤를 따라가다 그녀가 정리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음... 책은 분명 제자리에 순서도 위,아래도 확실하게 맞도록 꽂혀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 눈에 걸렸다. 무언가 거슬리는 점이 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손이 그녀가 정리한 책들을 다시 정리하고있었다. 조금씩 미묘하게 앞 뒤로 어긋나 삐쭉빼쭉한 모습이 거슬렸던 것이다. 책등이 완벽하게 일렬로 정렬되었다. 그제야 흐뭇하게 책장을 바라보고는, 이미 여학생이 정리하고 지나간 곳들을 되돌아 가며 다시 정리하였다. 그녀가 정리한 책들은 빈틈이 없어서 자신은 그저 줄을 새로 맞추는 일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줄맞추기는 다른 줄을 또 다른 줄을 정리하도록 만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책장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리하고있었다. 아. 이쪽 책장 저번에 한번 정리 했던 건데. 왜 또 하고있는거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만 둘까 싶었지만 이미 손을 댄 이상 성에 차지않으면 도저히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빨리하고 남은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 정리하고 있을 때 머리위로 그림자가 서렸다.
"정리하는거니?"
목소리가 들려와서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이 났다. 자신이 도둑고양이처럼 자신의 뒤를 살금거리며 쫓아다닌 것을 알아챘을까. 찔리는 것이 있어 쭈볏거리며 뒤로 돌자 아까 훔쳐보던 여학생이 서있었다. 바라보는 얼굴은 온화했지만 뜨거운 햇볕을 피하듯 그 시선을 피해 책장의 그늘 속으로 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이상해보이겠지. 내색않고 천천히 슬쩍 올려다 보았다가 주르륵 흐르듯 떨어지며 그녀의 목언저리를 바라보았다. 목 언저리 양옆으로 만져보면 분명 실크처럼(보다도 훨씬)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 한점 없는 실내임에도 결 좋게 살랑거렸다. 보통 이럴때면 위아래로 훑어보거나 흘겨본다고 오해를 사서 종종 시비가 걸리는 일도 많았다. 그렇지만 좀처럼 고쳐지지않는 버릇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도서부?" "네." "나도 도서부야. 못보던 얼굴인데, 몇 학년?" "1학년이요." "그래서 그렇구나. 안녕. 난 신루아야. 2학년." "안녕하세요. 청산..의..에요." "청 산? 외자야?"
남자아이 같은 이름이 부끄러워 항상 이름을 말할 때면 안그래도 없던 자신감이 몹시 쪼그라 들어 말라비틀어지는 듯한 기분이 된다. 가뜩이나 작은 목소리가 뒤로 가며 더 흐려지자, 잘 안들렸나보다. 결국 예쁘지도 않은 이름을 두번 말해야했다.
"아뇨, 청산의에요" "아~ 산이. 산이 맞지?" "네." "이름 예쁘다." "고맙습니다."
빈말일지도 모르지만 모델처럼 키도 크고 이름까지도 예쁜 선배의 칭찬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손가락 끝을 잡고 꼼지락거리며 살짝 고개숙여 인사했다. 비록 이름은 조금 틀렸지만 상관없었다. 제대로 알고있어도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그리고 자신도 그편이 조금이라도 여자아이 이름같아서 좋았다. 좀더 어릴적 친한 친구들이 몇 있었을 적엔 좀더 귀여운 별명같은 것도 만들어 주었었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모르는 얼굴이 가득한 곳.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의 생활은 자유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쓸쓸해졌다. 입학하고 1년이 다되어 가는데도 여즉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 얼굴도 못쳐다보고 바닥만 보고 다니면서 직설적으로 제 할말 다하는 아이는 넌씨눈(넌씨bal눈치도없냐)이겠지. 여자아이들 사이에선. 잠시 딴 생각으로 빠진 탓에 멀뚱멀뚱 서있게 된 선배는 상냥하게도 먼저 다시 말을 걸어주었다.
"아까 책을 보고 있길래,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방해됐니?" "아니에요." "정리 다한 것 같은데, 같이 앉아서 책 볼래?" "네,네! 좋아요."
어떤 책을 읽고 있었냐고 물어봐 주는 선배의 말에 보고있던 영미권 장르소설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해주며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읽고있다 중간에 내버려진 펼쳐진 책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던 책상 위로 마주보는 자리에 두꺼운 책 하나가 더 놓이게 되었다. 조심스레 펼쳐진 두꺼운 책안의 내용들은 알파벳이 가득했다. 소설책이나 문헌집이라기보다 참고서인 듯 했다. 이제 보니 선배의 손에는 볼펜심을 꺼내지 않은 볼펜이 들려있었다. 모두가 함께보는 참고서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보려는 배려같았다. 들어간 볼펜심 처럼 어느새 선배의 다정함이 들어와있었다. 그 간질거리는 느낌이 좋아서 책을 세워 읽는척 입가를 가리고 혼자 몰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선배가 계속 내가 하고 있는 삔이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다음에 언젠가 선배에게 같은 삔을 선물해주면서 친하게 지내달라고 해봐야지. 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을 상상하면서 혼자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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